봄날의 소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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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날의 소묘
  • 남해타임즈
  • 승인 2010.05.27 14:52
  • 호수 2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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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장 현 재
남해초교 교사

봄의 연주가 한창인 사월의 마지막 주말. 햇빛에 윤기를 발하는 감나무 새순들은 오월의 넓은 얼굴을 품고 모과나무는 벌써 녹색 성장을 펼치고 있다.
춘분과 곡우를 지나자 새벽은 일찍 찾아온다. 이른 하루의 시작은 새벽잠 적고 부지런함이 몸에 익은 할머니들이 먼저 문을 연다. 새벽 예불 종소리가 울린 지 얼마 되지 않았는데 밭에서 거둔 푸성귀에 이야기를 싣고 저자 가는 할머니들의 손수레 덜거덕거림이 새벽 공기를 흔든다. 몇 걸음 가다 숨을 돌리며 또래 할머니들끼리 자식 이야기, 손자 이야기, 어떤 병원에 무슨 주사를 맞으니 효험이 있다느니 하는 담소가 새벽 창문을 두드린다.
이렇게 한 무리의 사연들이 지나면 창밖은 환해지는 법인데 오늘 아침은 이상하게 늦게 밝아온다. 무슨 일인가 싶어 창을 열자 먹빛 하늘에서 습한 바람결을 타고 비가 쏟아진다. 무슨 봄에 소나기람! 한 시간 남짓 지나자 두꺼운 땅 껍질을 뚫고 나오는 새싹처럼 황금빛 햇살이 구름장을 깨고 여기저기 새 나오기 시작한다. 그 햇살에 드러나는 봄은 토란잎을 타고 구르는 물방울처럼 투명하다. 매년 이맘때 봄은 불청객인 황사와 송화 가루로 뿌연 날이 많은데, 오늘처럼 비온 뒤 마주하는 봄은 하얀 모시적삼에 청포도를 한 움큼 으깨어 물들인 모습 같다.
오전 일을 정리하고 촌집에 계신 아버지를 뵈러 가는 길이다. 들판의 보리는 연초록 융단을 만들어 바람에 비질 당하고 짝을 찾는 비둘기는 진종일 구구대며 장끼 울음소리에 메아리친다.
진달래도 한 철 지나고 못자리하려고 물 잡은 논에 비친 산 그림자 색깔이 다르다. 언덕배기 철쭉은 붉은 입술에 검은 깨알이 촘촘한 채 봄을 불어내고 측백나무 삼나무의 지난해 잎들은 연해지기는 하였으나 활엽수의 새 잎과는 구별된다. 하지만 조화를 이루는 모습이 농담을 달리하는 수채화 같다.
유행이 지난 옷을 입고 있으면서도 새로운 기쁨을 주는 자연 앞에 조금만 지나면 싫증나고 뭔가 튀고 싶은 것에 새로운 유행을 창조하는 사람들 세상이 부끄러워진다.
제비가 한두 마리가 낮게 날며 자운영 꽃이 흐드러진 무논 두렁에서 서로 부딪힌다. 짝을 찾고 사랑을 하는 모양이다. 이 제비는 아침잠을 일찍 깨우는 다른 하나로 참 부지런한 날짐승인데 날이 밝아오면 머리를 집 밖으로 향한 채 지저귄다. 비행을 하기 전 시야가 확보되기를 기다리며 하루를 계획하는 것이다.
제비는 공간이 확보되면 새 집을 짓지만 그렇지 않은 경우는 지난해 집을 보수하여 사용한다. 지금 아버지가 계신 집엔 해 마다 처마의 다른 곳에 집을 지어 어머니의 밉상을 받았었다. 그러면 아버지는 그 밑에 널빤지를 받쳐준다. 그런데 시멘트나 벽돌로 지은 지금 살고 있는 집의 제비는 적당한 장소를 찾지 못해 어려움을 겪는다. 그래도 인연이 되었는지 마침내 물색을 하다 천인단애한 곳에 둥지를 틀어 삼년동안 계속 찾아와 여름을 나고 간다. 아이들은 집을 찾아온 제비를 보고 부자 될 것이라고 좋아 한다.
십 여분 만에 시골집에 도착했다. 산 밑에 자리한 집이라서 탱자나무 새순과 하얀 꽃들이 유년의 기억을 더듬게 한다. 학창시절 이때쯤 되면 마음은 허전한 가슴앓이를 시작한다. 어우러지는 신록의 향연과 햇살에 발하는 탱자나무 새순을 보면 들로 산으로 뛰어 다니며 꽃도 찔레도 꺾고 보리밭에 뒹굴고 싶은 유혹에 젖어 들곤 하였다. 이제 그런 유혹은 삶과 생활이라는 조건에 맞추어 그리움으로 남았을 뿐이다.
아흔을 바라보며 혼자 지키시는 촌집의 이곳저곳을 둘러보고 정리를 한다. 뒤뜰에 가보니 다들 봄 바라기를 하는데 작년가을 빨간 태양의 선물을 준 대추나무는 새순을 올릴 기미가 없어 빨리 일어나라고 손으로 토닥이며 물을 한 바가지 준다.
오후의 봄 햇살이 나른하다. 송화 가루만 빈 청마루에 앉아 새소리 바람소리만 녹음하고 있는 집을 나서 바다를 본다. 예전엔 개펄이었지만 지금은 매립하여 운동장으로 사용하고 있다. 반대방향으로 약간 나가자 썰물로 바닥까지 신비를 드러내놓은 해안이 갯내를 풍기고 있다.
조심조짐 갯바위에 거미처럼 발을 옮겨 바닷가로 내려간다. 고둥, 진주담치, 미역 톳이 풍성하다. 굴 껍질에 손을 베일까 싶어 조심조심 고둥을 잡으면서 물결에 일렁이는 곳을 보니 미역귀가 보인다. 끊어  한입 베어 물자 바다향이 입안에 가득해진다. 그 향은 미역귀를 자르는 동안 보릿고개를 지내던 어머니의 생전 이야기를 떠오르게 한다.
어머니는 보릿고개 시절 많은 시집식구들의 한 끼를 준비한다는 것이 힘들었다하셨다. 끼니를 거르는 일이 잦았고 친정이 가까이 있었지만 외할머니는 딸이 사는 곳에 와서도 인편에 기별을 넣어 잠시 얼굴만 보고 갔다는 것이었다. 그 당시가 지금 이때쯤 이었을 것으로 기억하였다.
영등할멈 올라간다고 바람은 고양이 소리처럼 울어대던 날, 이 길을 따라 외할머니와 같이 걸으며 어머니는 바다로 외할머니는 외갓집 향했다 한다. 그리고 헤어질 때 굶지 말고 잘 챙겨 먹으라고 치맛단에서 끄집어 낸 꼬깃꼬깃한 지폐 몇 장을 던지고 본인은 뒤도 안돌아보고 쓰개치마 둘러쓰고 발걸음을 옮겼다고 했다. 어머니는 멍하니 갯바위에서 파도세례를 받으며 주청이며 청다리 뿌리를 캐어 식구들 의 때 꺼리를 준비하였다 한다. 그런 일들을 생각하며 한 생을 마감한 어머니가 섰던 자리에 취미 겸 소일 겸 개바리를 하고 있는 자신이 부끄러워진다.
사람의 손이 닿지 않는 곳의 고둥은 씨알이 굵었지만 잡기란 힘들었다. 물이 차오르기 시작한다. 이제 밀물이 시작된 것이다. 더 차오르면 바위섬에 갇힐 것 같아 서둘러 빠져 나온다. 욕심은 화를 부른다는 생각을 하며 야생차를 수확하는 산 사람들의 이야기가 생각난다. 야생차를 수확하는 사람들이 곡우 전에 채취한 것은 우전이라 하여 귀하게 여긴다. 이런 야생차를 수확하는 사람들은 두 번을 참고 차를 딴다고 한다. 처음 눈에 바로 띄는 것을 따면 차나무의 성장을 막고, 두 번째 본 것을 따면 내년의 차 수확을 기대할 수 없어 세 번째 눈에 띄는 것을 딴다는 말을 들었다. 그래서 차향이 혼란한 마음을 진정시켜주는 효험이 있는지 모른다.
돌아오는 길. 부딪히는 파도소리를 들으며 해변을 걷는다. 흩어진 돌은 몽돌들이다. 파도와 세월에 깎여 더 이상 깎일 곳도 없는 둥글음이 우주를 상징하는 것 같기도 평생을 살아온 노인들의 모습 같기도 하다. 길어진 오후는 자운영 꽃핀 들녘을 물들이고 있다. 수확을 가지고 가는 것은 이렇게 기쁜 것일까? 마치 시험치고 백점 받았다고 어머니에게 자랑하려고 잰 걸음 헐레벌떡 뛰어가는 아이 마음 같다.
소나기 후 맑아졌던 봄날 오후가 흐려진다. 일기예보는 강풍과 함께 내일은 황사가 전국적으로 올 것이라 했다. 아가의 얼굴 같은 깨끗한 봄날을 시샘하는지 청명한 봄날 보기가 힘들어진다. 모두들 개발이라는 자연을 소유하려는 욕심이 지구환경의 인내심에 바닥을 드러내게 하여 가져온 결과 같다.
욕심도 서두름도 없이 느긋한 늦잠을 자는 대추나무처럼 자기할 일을 자연의 흐름에 맡기고 어우러지는 오월을 보듬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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