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포소설의 성립과 창작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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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포소설의 성립과 창작 배경
  • 남해타임즈
  • 승인 2010.06.04 16:26
  • 호수 20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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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포소설과 심청전에 형상된 관음의 동일성 중심으로 -

박 성 재
- 남해역사연구회
   유배문화연구소장
-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6) 구운몽과 심청전의 공통점은 불교와 용궁

구운몽과 심청전의 작품 중에 불교와 수궁이 보이는데, 그 공통점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공불염송(功佛念誦)외면서 오는 모양, 두 귀는 양견(兩肩)에 청처짐하고 눈(雪)빛 같은 두 눈썹은 얼굴을 덮고 있고 총감투[각주: 말의 갈기나 털로 피륙을 짜서 조각을 지어서 만든 머리에 쓰는 모자] 두 귀 눌러 흠뻑 쓰고 천은장도(天銀粧刀)[각주: 천은(天銀) 순도 100%의 순은으로 만들어 주머니 속이나 옷고름에 차고 다니는 작은 칼, 장도(粧刀) 은장도(銀粧刀)] 빗기 차고 주석 장식(朱錫裝飾) 철죽장(鐵竹杖) 걷어 짚고 염불하며 내려온다. (중략). 심청이 이 말을 듣고 추파(秋波)[각주: 가을날의 잔잔하고 아름다운 물결 곧 맑고 아름다운 미인의 눈길]를 반개(半開)[각주: 반쯤 핀 꽃, 살며시 반쯤 뜬 미인의 아름다운 눈]하고 자세히 살펴보니 중 하나 앉아 있는데 두 귀는 양견에 늘어지고 서리 빛 두 눈썹은 얼굴을 덮어 있고 쪽 감투 두 귀를 눌러 쓰고 백발염주 목에 걸고 다 떨어진 갈포장삼(褐袍長衫)[각주: 베옷, 거친 베로 지은 장삼, 한서(漢書) 수갈부완(?褐不完)]떨쳐입고 은연(隱然)히 앉은 거동 태백산 아니거든 호승 오기 만문 하고”
위의 소동파 관음예참문과 심청전의 대목을 살펴보면 천 년 전의 소동파가 다시 살아온 듯한 내용이다. 이 무렵 관음참회(觀音懺悔)신앙이 크게 성행하였으며, 그 흐름의 한 가운데 곡성 성출산(동악산)도림사가 있었고, 남해 관음영장(觀音靈場) 보광산에 보리암이 있다는 것은 심청전과 서포소설이 가지는 공통분모라 할 수 있는 관음신앙의 동질성은 능히 짐작이 가는 바이다.
김인후가 표류하여 온 복건성 서우(徐祐)라는 사람과 주고받은 글 가운데 수궁과 관련된 자료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화작하여 서조대에게 증하다(和贈徐措大)
사해가 오늘날엔 한 집에 되었으니
사람은 어딜 가도 삶을 불일 수 있다네
남녘바다 성낸 파도 붕새 나는 구만리요
연경(燕京)이라 북쪽의 머나먼 삼천리길 거울 속의 여윈 몰골 백발을 재촉하고
베개 위 맑은 눈물 현화(玄花)를 자아내네.
예서 고향 가자 면은 열흘 남짓 걸리리니
패궐(貝闕)의 앞머리에 큰 절을 드리겠지.
위의 화작한 글에서 패궐(貝闕)은 물을 다스리는 신(神), 하백(河伯)이 머무는 곳으로 붉은 조개로 만들어진 궁궐이라는 뜻이다. 초사(楚辭)에 자패궐혜주궁(紫貝闕兮珠宮)이라는 구(句)가 있다. 이는 곧 수궁(水宮)을 뜻함이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지금의 광양제철이 자리한 전남 광양 해안에서 해작꾼(바다의 농사꾼)들이 생산하던 돌김으로 당시에는 임금에게 진상하던 진귀한 해산물이었으니 용궁에 다녀왔다는 성진에게 빗대어 농을 한 것이다. 이는 전남 광양 해안과 남해는 관음포와 연결되어 있다는 것은 불교와 지정학적으로 연관이 있다고 보아야 한다.
주지하다시피 남해는 신라고찰이 있고 적소인 노도 맞은편에 남해의 영산인 보광산이 있으며, 보광산에는 전국 3대 기도처인 관음도량 보리암이 있다. 그리고 노도와 인접한 곳에 석교라는 마을이 있고 이 마을에 돌다리(石橋)가 있었다. 그래서 적소인 노도 주위의 배경이 동정호의 축소판인 앵강만은 구운몽 소설에 나타나고 있어 구운몽은 남해에서 지었다고 보아야 한다.
이와 같이 ‘구운몽’과 ‘심청전’의 작품의 공통점은 불교와 용궁을 배경으로 했다는 점이며, 남해와 남원은 관음참회 신앙과 관계가 있다는 것은 어떻게 설명되어야 할 것인가?

7) 송강의 문학에 심취

김만중 역시 송강의 문학에 심취하였다. 1672년 김인후의 문집을 정리한 박세채와 돈독한 사이였던 김만중이 송강의 스승인 김인후의 많은 작품들을 보았을 것이라는 추측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김만중은 『西浦漫筆』下卷에서
송강(松江) 정철(鄭澈)은 기상이 호방(豪放)한데, 때로 술을 마시면 작시(作詩)에 실수를 했다. 문간선생(文簡先生) 성혼(成渾)이 이를 꼬집어내자, 송강은 처음에는  아무 대답이 없다가 큰 소리로, 山雨夜鳴竹(산우야명죽) 산비 밤에 대나무를 울리고, 草忠秋近床(초충추근상) 풀벌레 가을에 침상에 다가오네. 라 읊으면서 이것도 하자가 있느냐고 했다. 문간(文簡)이 웃으면서 그 아랫 구의, 流年那可住(유연나가주) 흐르는 세월 어찌 막을 수 있으랴? 라고 함도 좋은 점을 발견할 수 없다 하였다. 지금 살펴보니, 이 말은 아주 어울리지 않는다. 문간의 평은 지극히 정확하다.[각주 : 『西浦漫筆』下卷, pp.387~388.]
또한 같은 책에, 송강(松江)의 관동별곡(關東別曲), 전후사미인가(前後思美人歌)는 우리나라의 이소(離騷)이나, 그것은 문자로써는 쓸 수가 없기 때문에 오직 악인(樂人)들이 구전(口傳)하여 서로 이어받아 전해지고 혹은 한글로 써서 전해질 뿐이다. 어떤 사람이 칠언시로써 관동별곡을 번역하였지만, 아름답게 될 수가 없었다. 혹은 택당(澤堂)이 소시(少時)에 지은 작품이라고 하지만, 옳지 않다.[각주 : 서포만필 하권, p.388.]
송강가사 세 편이 애당초 우리말로 지어졌으므로 그것을 한문으로 번역한다 하더라도 본래의 아름다움을 살려낼 수 없다는 것이 서포의 기본 생각이었다. 서포는 사람의 마음이 입을 통해 표현된 것이 말이고, 말의 가락을 살려 노래 부른 것이 바로 시가라 했다. 그러므로 각 나라마다 말이 있으므로 시가는 자국어로 노래 부르고 자국 문자로 적는 것이 마땅하다. 따라서 천지를 감동시키고 귀신과 통할 수 있는 시가 작품이란 유독 한문으로 표기해야 할 이유가 없는 것이라고 우리말 옹호론을 주장하고 있다.
하지만, 김선기가 내린 결론에 의하면 “서포는 분명히 아정(雅正)한 내용이 있어야 한다는 조건을 내세웠다. 그것이 충족되고 아울러 우리말로 표현될 때 진정(眞情)한 작품이 산출된다고 보았기 때문이다.”라고 주장하고 있다. 여기서 아정(雅正)한 내용과 진정(眞情)한 작품이란 김인후가 남긴 글이나 시에서 구운몽과 유사한 심청전을 두고 한 말로 추측할 수 있다. 왜냐 하면, 김만중 역시 송강의 문학에 심취하였고 1672년 김인후의 문집을 정리한 박세채와 돈독한 사이였던 김만중이 송강의 스승인 김인후의 많은 작품들을 보았을 것이라는 추측은 충분히 가능한 일이다.
그렇다면 김인후가 “학전상인의 시축서(詩軸序)[각주 : 시축서(詩軸序) 시를 적은 두루마리에 쓰다. 승려 학전(學專)의 시를 적은 두루마리에 글을 쓰다.]에 쓴 글을 보아도 남원의 역사 이래 수많은 영웅호걸들이 삼신산을 찬탄하였고 광한루에 올라 남긴 글들을 보면 비록 15, 16, 17세기라는 시간의 차이는 있지만 매월당 김시습, 하서 김인후, 서포 김만중, 세 사람으로 이어지는 불교문학적 역할을 능히 짐작할 수 있는 일이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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