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란과 추억, 농고 1회를 추억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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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란과 추억, 농고 1회를 추억하며
  • 남해타임즈
  • 승인 2010.06.04 16:59
  • 호수 20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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류 귀 주
남해농고 1회 졸업생

지난달 20일자 남해신문 17쪽 서울소식란에 적혀있던 기사를 유심히 읽었다. 남해농고 제1회 졸업생도 참석했다지만 사진에서는 남해농업중학 3년 졸업 또는 수료자, 중퇴자만 있었고 정작 남해농고 1회 졸업생은 한사람도 없었다. 그렇지만 그 기사와 사진을 보니 과거 잊혀져 있던 기억들이 새록새록 떠올랐다.
1945년 8월 15일, 36년간의 일제 탄압에서 벗어나 해방을 맞이했다. 기쁜 마음도 잠시 우리 또래들은 한글을 잘 몰라 입학시험을 치를 수가 없었다. 다음해 9월로 학기를 늦추고 한글에 일본글로 음을 달아서 우리 한글과 역사 등을 배웠다. 그렇게 공부를 하며 1946년 입학시험을 치렀고 남해농업중학교 1학년에 2학급, 130여명이 9월 1일자로 입학했다.
1946년 9월부터 1952년 3월 사이에 그만 갑종중, 을종중, 전수과 등 학제 개편을 거치며 학창생활을 보냈고 62명이 남해농고 제1회 졸업생이 됐다.
6ㆍ25 전쟁 중 졸업을 하게 된 우리는 대학에 진학하면 졸업 때까지 병역이 보류됐고 그렇지 못한 사람은 졸업과 동시에 군대에 입대해야만 했다.
대부분 장교로 임명돼 일선소장으로 부임했고, 간혹 일반사병이나 경찰관으로 근무한 친구들도 있었다.
6ㆍ25 전쟁을 치르며 몇몇은 나라와 민족을 위해 꽃다운 젊은 나이에 산화했고, 또 일부는 부상을 당하기도 했다.
그때를 회상하면 참으로 아득하기도 하고 또 한편으로는 바쁘게 지나온 세월이 주마등같기도 하고, 허무하기도 하다.
학창시절, 비오는 날에는 대부분 삿갓 쓰고 등하교하던 모습과 숙제를 하지 않거나 문제를 풀지 못해 꾸지람을 듣던 모습. 실습지에서 농사짓고 농산물을 시내에 팔러 다니던 모습, 가축을 기르고 온갖 농사일을 배우던 일, 참으로 아득한 과거지만, 머릿속에는 바로 엊그제 일같이 생생하게 떠오른다.
은사님들에 대한 기억도 떠오른다. 실과지도 선생님은 우리들과 같이 신발 벗고 논밭에서 실기지도를 해주셨고 못자리판에서 피 뽑을 때는 거머리에 물려 피를 흘리기도 했다. 그때의 은사인 고정훈 선생님은 농고 3학년때 1회 졸업생 담임이셨는데 퇴직 후 전국 천도교 교령도 지내셨단다. 지금은 서울에 살고 계신줄 안다.
그리고 박종수 은사님께서는 생전에 나에게 한시를 지어주기도 했다. 그 한시는 병풍으로 만들었다.
본인은 1978년부터 1997년 퇴직할 때까지 약 20여년간 개인의 뜻에 의해 매년 스승의 날이면 초중고때의 은사님을 한자리에 같이 모시고 옛날 정담을 나누기도 했는데, 현재는 그러지 못하고 있다.
현재 모교는 1967년 남해종고로 교명을 바꾸고, 1997년에는 남해종고와 남해여고를 통합해 교명을 남해제일고로 바꾸면서 우회도로 아래쪽 들판으로 내몰리고 말았는데 지금은 남해농고 자리에 남해대학이, 농고의 실습지에는 남해중학교가 들어서 있다.
교정에서 우애를 나누던 동기들, 출석번호 1번이자 졸업증서 1호인 박충섭(설천)과 출석번호 2번이자 졸업증서 2호 이종근(서울)을 비롯해 남해에 9명, 객지에 10명, 외국에 2명 정도가 생존하고 있는 것으로 알고 있다.
그리고 우리들의 선배인 남해농업전수학교 14회 졸업생까지와 1951년 남해농업중학교 6학년 졸업생 등도 있다. 또한 남해농고 1회 졸업생 중에는 선배님 4명이 학위취득을 위해 편입학해 같이 졸업했다.
기억을 더듬자니 참으로 끝이 없다. 너무도 즐거웠던 기억 속에 너무나도 보고싶은 얼굴이 가득하다. 지금 당장은 보지 못하지만 80세 전후의 동창생들이 앞으로도 건강하고, 건승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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