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포소설의 성립과 창작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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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포소설의 성립과 창작 배경
  • 남해타임즈
  • 승인 2010.06.17 11:54
  • 호수 2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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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포소설과 심청전에 형상된 관음의 동일성 중심으로 -

박 성 재
- 남해역사연구회
   유배문화연구소장
- 국사편찬위원회
   사료조사위원

 

몸이 불 속에 들어가니 만날 기약 있겠고, 가죽을 벗겨 북을 만드니, 가죽은 궁성(宮聲)이라 궁귈에 들어갈 징조요,  낙엽이 뿌리로 돌아가니 자손을 만나리라.
"좋은 꿈이오니 대단히 반갑습니다." 심봉사가 웃으며 말하기를, "속담에 '천부당 만부당', '가죽과 살의 관계', '지어낸 말'이란 말 이 있소. 내 본디 자손이 없는데 누구를 만나겠소. 잔치에 참례하면 궁궐에 들어가고 관청의 밥도 먹게 될 테지요."

인용문에서 심봉사가 자신의 팔자가 기박함을 안씨맹인에게 말하자 그가 해몽하는 대목이다. 이는 세수를 하고 향을 피워 놓고 포단에 단정히 앉아 참선 후에 축문 읽고 점괘를 풀어 글을 지었다는 내용이다. 
특히 「탑암정좌(榻巖靜座)」는 선학(禪學) 에 깊이 융입된 경지로 보이는데, 이러한 경지는 선가(仙家)에만 나타나는 것이 아니라 형역(形役)의 자취를 성찰하고 깨끗한 마음 밭을 가꾸려는 일반적인 수양[각주 : 趙麒永, 『河西詩學과 湖南詩壇』p.239.(재인용)]에 해당한다고 본다. 이러한 작품들은 김인후(金麟厚)가 정관적(靜觀的)이며 담탕(澹湯), 한가(閒暇)한 정신영역을 지향하고 있음을 드러낸다.

 

8. 김만중의 초월적 이상세계

1) 김만중의 불교관(佛敎觀)
서포는 불교, 성리학, 양명학, 나아가 도교까지를 포함한 사상 전체에 대해 객관적 입장을 취하면서, 그 모두에 대하여 전적인 공감을 느끼지 못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또한 선(禪)이 바뀌어 유(儒)가 되었다는 표현은 성리학의 태생적인 비밀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것으로, 과연 이런 주장이 당시에 인정될 수 있는 것인지 궁금하다. 아마도 당시의 일반적 견해에서 보았을 때 김만중의 주장은 비난받을 만한 소지가 많은 것이라 하겠다.

한편 서포는 한국·중국의 학술·철학사상 등과 불교의 긴밀한 상관성[각주 :『漫筆』, pp.233~234. 참조.] 및, 그 교류관계에도 주목하여 그 사실을 밝힘으로써 불교의 위상과 실상을 정립하는 데도 주력하였다. 이것은 한 ? 중의 철학 사상의 실체와 역사를 잘 아는 학자로서 모든 것을 사실 그대로 밝히자는 양심과 사명감 때문이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신유학의 형성·전개과정과 실체를 거론할 때는, 자연스럽게 불교의 영향을 적극 조명하고 나섰던 것이다. 서포는 성리학이 선학의 영향을 받았음을 “정자(程子)와 장자(張子)(橫渠)의 학문이 선가에서부터 변해 인습적으로 쓰고 고치지 않았던 것”[각주 : 『漫筆』, pp.164~165. 而門下之人 見聞已慣 不肯從令.] 이라고 인식하였다. 나아가 서포는 주자가 인의(仁義)에 대한 태도로써 분류하여 불노(佛老)를 이단으로 배척하는 것은 공자나 맹자의 뜻은 아닐 것이라 하였다.
김만중의 이 같은 불교 우호의 입장을 불교가 우리나라의 학술과 문화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쳤다는 생각에 까지 이르게 된다.

서포의 유불일치론은 기본적으로 유교사상에 대해서 불교가 지닌 사상적 우월성을 전제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구심이 들기도 한다. 그럼에도 우리는 만필(漫筆)에서 자주 등장하는 불가, 도가에 대한 언급마저도 현실에서 유가적 세계관을 구현하기 위한 눈 돌림이라고
얼마든지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만필(漫筆)에 실린 불교관계 기록을 살피다보면, 그는 한 걸음 불교 쪽에 가까이 다가가 그 종교 사상적 장점을 변론해 주고자 하는 열의로 가득 차 있는 듯하다. 

2) 김만중과 관음사상
서포가 만필(漫筆) 하권(下卷)에서 ‘관세음대사(觀世音大師)’, ‘관세음도(觀世音圖)’를 말한 것은, 그가 회화의 이론에 밝고 실제 작품이나 화보(畵譜)를 박람하여 가위 독보적인 안목을 갖추었다.[각주 : 史在東, 「西浦 金萬重의 文化史的 位相」, 서포문화제 학술세미나 발표논문, 2005. pp.41~42.] 특히 그는 화론과 화보와 문학의 상관성을 문학예술의 차원으로 승화시키고 있었던 터다. 이러한 경지가 다음의 언급에서 잘 나타난다.

그가 만필(漫筆) 하권(下卷) 114칙에서 학곡(鶴谷)은 시재(詩才)가 비록 높지만 재료를 취함에 넓지 못하여 (중략) 뒤에 그 화보를 보니 바로 선재참관세음도(善財參觀世音圖)였다. 공은 아마 관음을 선자로 앵무를 청조로 오인했던 것이다. 선배들이 외가잡서를 보지 아니했다 함을 알만 하다.[각주 : 『漫筆』, p.348. 鶴谷詩才雖高 取材不博(中略) 後見畵譜 乃善財參觀世音圖 公盖誤認觀音爲仙子 鸚鵡爲靑鳥耳 前輩之不看外家雜書可知.] 일찍이 佛書를 보니, “관음대사가 32개로 몸을 변신시켜 末俗을 교화한다.”하였다.

[각주 :『 漫筆』, p.196. 觀音大師現三十二化身 敎化末俗.]라고 하였으니, 이는 곧 유자(儒者)들이 자신의 세계 이외에는 눈을 돌리지 않는 것을 들어 유자들의 편협한 시각과 관념을 공박하고 있다. 말하자면 학곡(鶴谷)이 오도자의 유명한 관세음도(觀音圖)를 고씨화보(顧氏畵譜)로 오인한 탓에, 그 관음을 선자로, 앵무를 청조로 잘못 보게 되었다는 이야기다. 이러한 사례를 근거로 들어서 선배 학자·문인들이 외가잡서를 보지 않은 편견과 무지에 일침을 가한 점은 놀랍고 날카롭다. 서포는 사상적 공유나 이해를 갖추는 당대적 분위기가 유지되었다면 굳이 비교적 입장에서 유불선에 대한 비교적 관점의 논리를 거론할 필요가 없다는 점을 밝히고자 한 것은 아니었을까? 

또한 서포의 불교와 관련 된 두 작품인 구운몽과 사씨남정기(謝氏南征記)는 중국을 공간적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에서 동일하다. 그러나 사씨남정기에서는 유가적 인물의 삶을 중심으로 삼으면서 서사적인 전개를 이끌어 가고 있다. 그러나 이 작품의 특성은 다른 가정소설류와는 달리, 주요 인물들의 모든 생을 바라보면서 위기 때마다 그들을 구원하고 이끌어주는 관음보살(觀音菩薩)이 상위적 존재로 자리하고 있다는 점이다. 즉, 사씨남정기에서는 유가의 열녀(烈女) 이야기와 불가(佛家)의 관음(觀音)의 구제 이야기를 연결시키면서, 한편으로는 사씨의 남행을 화엄경(華嚴經), 더 구체적으로는 ‘관음도(觀音圖)의 선재동자(善才童子)’의 선지식 찾기 소재를 원천으로 삼아 그 의미를 심화시키고 있는 것이다.

이와 같이 서포는 ‘만필’ 하권 제2칙, 제114칙에서 관세음보살을 언급하고 있다. 앞에서도 언급했듯이, 그가 남해 유배지에서 집필한 불교와 관련된 ‘만필’ 하권·사씨남정기는 유배지에서의 환경이 불교적 성향에 미친 영향이라고 볼 수 있다. 왜냐하면, 관음보살의 위신력이 3차 유배지인 남해로 쫓겨 온 자신의 어려움을 구원할 힘이 되어 줄 것이라고 생각했을 수도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최소한 자신의 구원이라는 소승적 자세보다는 구운몽에서 보여 주었던 대승적 자세, 특히 정치현실에서 일어나야 할 바른 질서와 도리 회복에 관한 간절한 염원이 작품 속에 드러나 있음은 분명하다.

본디 서포는 서포거사(西浦居士)임을 자처하며 불학자(佛學者), 선객(禪客), 포교법사(布敎法師), 불교문학자로서의 이론과 업적을 남겼다.[각주: 사재동,『불교계 국문소설의 연구』(중원문화사, 1994) p.362.] 그뿐만 아니라 서포는 관음신앙(觀音信仰)에 대해서도 여느 유학자와는 다른 인식을 하고 있었고, 그것을 확인할 수 있는 기록도 위의 인용문에서 볼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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