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불과차로 알려진 금산의 암각화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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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불과차로 알려진 금산의 암각화는
  • 남해타임즈
  • 승인 2010.08.05 16:49
  • 호수 21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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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 장 대 우

장 대 우
前 남해문화원장
남해서복회 사무국장

오랜 세월동안 전설 속에서만 묻혀 내려오던 서불과차에 대한 논란이 계속 되고 있는 가운데 남해는 국내에선 유일하게 남아 있는 흔적과 유적 등 고귀한 문화재를 가지고 있음에도 활용이나 개발을 재대로 않고 지켜보기만 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중국 고고학자 류봉군 교수와 인제대학 진태하 교수가 현지를 답사하니 전설적인 것보다는 학술적으로 볼 때 약 3500~4000년 전의 골각문자로 보는 것이 옳은 것으로 추정하는 등 또다시 새로운 사실이 밝혀져 학계에 크나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다.

이같은 사실은 지난 17일 현지에 온 중국 교수들에 의해 새로운 사실로 밝혀진 것이다. 한국고대문명이 오래됐지만 지금껏 유물이 훼손되고 방치되고 있음이 매우 안타깝다고 말하면서 남해는 남해문화로서 문화관광으로 보는 관광이 돼야 한다고 강조했다.

남해 서복회 (회장 박창종)의 안내에 따라 암각화로 나선 류 교수 일행들은 중국 진시황이 불로초를 구하기 위해 동남동녀 500여명을 남해안으로 보내 왔던 그 시절이 중국 6개국이 통일되고 난 뒤라며 그 당시는 한자가 쓰여지던 시대로 이 암각화에 새겨진 글과는 1천여년이나 앞선 동의민족시 동의 문화건으로 형성된 문자로 3500~4000여년 전의 것으로 보이는 골각문자라고 추정했다.

이 금산일대는 문화행사를 많이 했던 곳으로 추정되며 암각화는 철기시대를 벗어난 청동기시대에 상징적 의미로 뜻을 표현한 도형이나 그림으로 표출한 금속을 아주 기술있게 판 것으로 보아 공예기술자들의 작품이라고 추정했다.

또 청동기 이후에 금속부호로 원주민들이 농사를 시작할 때 높은 신성한 산을 찾아 농사를 잘되게 해달라는 제사와 기우제를 지내며 받침대에 곡식을 놓고 멍에를 쓴 소가 밭을 가는 모습등을 묘사한 그림들이라고 판명했다.

따라서 이 그림은 문자 발달과정에서 나온 고대문자 문화활동에 대한 도용 부호로서 문화 행사의 뜻으로 새겨놓은 것이 아닌가 보고 있을 뿐 아니라 중국의 하남성 구차산에서도 이같은 동일한 그림문자로 보아서 진시황시대때보다 1천여년이나 더 앞선 3500~4000년전의 것으로 추정된다고 밝혀 고고학자들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게 됐다.

중국 전국시대와 고조선시대엔 상형부호로 농경문화를 형상화시키기 위해 논과 밭을 가는 농경시대의 관찰느낌으로 판단하나 더욱 연구 검토가 필요하다고 전했다.

또 상주면 백련마을 입구묘지에 있는 글은 양아리 석각 보다는 1천여년이 더 앞선 석기시대의 유적과 중국의 골각문과의 같은 연대에 속하는 것으로 보아 4500여년전의 도상부호로 보인다며 마모상태로서 훼손이 많이 됐다는 것이다.

금산의 암각화 보다는 더 오래된 것으로 보며 4500년전의 골각문으로 본다고 전했다. 또 도로변 거북등 역시 석기시대의 도기 지형도 같다며 이 일대를 유물 공원으로 조성, 관광사업은 물론 광관지로 연계해야 한다고 덧붙였다

또한 큰바위(거북등바우)는 거북바위라기가 아닌 음석이라고 밝혀 화제를 모았다. 이 음석바위는 여성의 성기를 상징하는 음부와 엉덩이 형상으로 당시 애기를 가지지 못하는 사람들이 돌에다 구멍을 내 오늘날 수백개의 작은 구멍이 난 형상으로 본다고 한다.

이날 남해 서복회 회장과 신주찬 부회장, 이금수 운영위원장 등 임원단은 뒤늦게나마 서불진위 논란보다 관광자원화가 우선돼야 한다며 이구동성으로 입을 모았다.

남해군은 지난 2006년 10월 20일 서불과차에 대한 고대수수깨끼를 풀기위한 학술 심포지엄을 개최했으나 실마리를 찾지 못해 아직까지도 서불과차에 대한 입증보다 암각화 자체연구에 중점을 둬야 할 것이라고 밝혔다. 그러나 계속 각국나라들의 관심 있는 학자들의 현장조사가 끊이질 않고 오늘에까지 이르고 있다.

그런데 여기에 온 중국고고학자들 중 10대에 낀다는 진 교수는 동북아 고고학자들의 의하면 갑골문화보다 앞선 골각문이라며 앞으로 일본ㆍ한국ㆍ중국ㆍ유럽 등의 고고학자들을 불러 연구 검토한 내용으로 심포지움을 열어야 할 것이라고 강조 했다. 또 이들 교수들은 귀중한 유물 유적을 아무렇게나 방치해둔데 대해 안타까운 표정을 지었다.

진시황과 관련된 서불과차는 특히 중국과 일본사람들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키고 있는 것으로 중국과 일본, 인도 등 각국나라의 고고학자나 전문 교수 등 고대문자를 확인차 매년 오늘날에 이르기 까지 수차례씩 다녀간 것을 비롯해 국내 제주도 서복학회와사학자 연구가 등 수많은 교수들도 앞으로 서복에 대한 연구와 교류를 유지 해 나가자는 뜻으로 사실여부를 재 확인차 다녀간바 있으나 아직도 확실한 고증과 판독을 못하고 수수깨끼로만 수많은 세월을 보내고 있을 뿐이다,

한편 류 교수는 상주면 양아ㆍ두모리 일대를 유물 공원화로 조성ㆍ관광사업과 연계해야한다며 서불과차에 대한 입증보다 암각화자체연구에 중점을 둬야한다며 이 문자는 고대 역사를 밝히는데 귀중한 실마리가 될지도 모르는 중요한 유적이라고 말했다.

남해 서불과차의 현주소
관리번호 제1호
상주면 양아리 84~1번지 백련다리봉산 언저리(바닥가로부터약30미터)-상륙지로알려짐(추상)

관리번호 제2호
백련리 105~5번지 입구도로변(묘소옆)

관리번호 제3호
상주면 양아리 151번지(양아두모고개 도로변의 거북등그림으로 암각화)

관리번호 제4호
상주면 양아리 산18-3번지

관리번호 제5호
상주면 상주리 180번지

관리번호 제6호
(도지정문화재 1974. 2. 16)
양아리 산 4-3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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