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불과 동남동녀는 어디로 갔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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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불과 동남동녀는 어디로 갔을까?
  • 남해타임즈
  • 승인 2010.08.13 17:42
  • 호수 21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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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 홍 주
본지논설위원·‘남해 바래길 사람들’운영위원

지금으로부터 2230여년전, 기원전 221년 진나라 시황제는 중국 최초로 한나라 등 6국을 멸하고 천하를 통일하여 이후 2천년 중국왕조들의 기본틀을 마련하였다.
이후 분서갱유사건을 일으키고 아방궁을 짓는 등 폭군이라는 비판을 받았지만 도량형을 통일하고 만리장성을 완성하는 등 국가체제를 정비한 진시황은 자신의 무병장수를 위하여 서불(徐示)에게 동남동녀 500명을 주어 바다건너 삼신산의 불로초를 구해 오도록 하였다.

서불은 영악으로 알려진 남해 금산을 찾아왔으나 불로초를 구하지 못하고 수렵 등을 즐기다가 떠나면서 자신들의 발자취를 남기고자 ‘서불이 이곳을 지나가다’라는 의미의 서불과차문(徐市過此文)을 남기고 갔다는 전설이 있다.
그의 행적은 서불설화로 전해져 남해상주 양아리, 제주 서귀포시 정방폭포, 거제 해금강 등 한국을 거쳐 일본까지 폭넓게 이어짐으로서 중국과 일본을 문화관광자원으로 연결시킬 수 있는 문화유적으로 자리하고 있다.

 서불과차의 전설로 알려진 상주면 양아리 금산 부소암의 평평한 바위에 새겨진 암각화는 음각으로 된 그림문자인데, 1974년 경남도 기념물 제6호로 지정됐다.
주위에는 새모양, 거북등 모양과 같은 상형문자와 비슷한 암각문자가 많이 산재하고 있으며, 지난해 남해군에서는 서불설화를 활용한 문화콘텐츠를 개발하여 암각화 주변의 관광지와 연계한 새로운 테마 관광자원으로 개발하는 방안을 적극 검토했다고 한다. 

 그런데 지난 7월 17일 남해를 방문한 중국의 고고학 교수일행은 서불과차로 알려진 양아리 일대의 암각화를 살펴보고 고대 갑골문자보다 앞선 골각문자라는 새로운 사실을 밝혀 한국고대문명 유적지로 학계에 많은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이들에 따르면 상주면 양아리 금산 일대의 암각화는 진시황시대보다 1000년이상 휠씬 이전인 3500여년전 청동기시대이후에 신성한 산을 찾아 농사가 잘되게 기원하는 제사나 기우제등의 문화적 행사를 지냈던 흔적으로, 멍에를 쓴 소와 쟁기로 밭을 가는 모습을 묘사한 것으로 청동기시대에 농경문화를 상징적으로 표현한 도형이나 그림을 금속을 사용하여 새긴 것이라고 한다.

그리고 상주면 백련마을입구 묘지에 있는 암각화는 많이 훼손되었지만 양아리의 것보다 1000여년이 더 앞선 석기시대의 유적으로 중국의 골각문과 같은 연대에 속하는 것으로 4500여년전의 도상부호로 추정된다고 하였다.  

 남해군은 지난 2006년에 서불과차에 대한 고대수수께끼를 풀기위한 학술심포지엄을 개최하는 등 많은 노력을 하였음에도 실마리를 찾지 못하고 있으며, 일부 관심있는 학자들은 서불과차에 대한 진위입증보다 암각화 자체연구에 더 많은 관심을 가져야할 것이라고 뜻을 모으고 있는 것 같다.

제주 서귀포시에는 100억원이 넘는 막대한 사업비를 투자하여 서복전시관을 조성하였음에도 불구하고 흥미를 끌 수 있는 특별한 볼거리를 갖추지 못한 때문인지 당초의 취지를 살리지 못하고 중국인은 물론 내국인 관광객들로부터 외면당하고 있다는 현실을 눈여겨 보아둘 필요가 있을 것이다. 

 오랜 세월동안 전설로서 전해오는 상주 양아리 일대에 산재해있는 암각화는 서불과차에 대한 논란에도 불구하고 현재 국내에선 유일하게 원형 그대로 남아있는 서불과차문이라는 사실 외에도 우리나라 고대 골각문자라는 귀중한 문화유적으로 추정되고 있음에도 관광자원으로의 충분한 활용이나 적절한 보존조치를 취하지 않는 것은 재고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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