용감한 사나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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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감한 사나이
  • 남해타임즈
  • 승인 2011.04.28 15:59
  • 호수 25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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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흥우 에세이

나는 새벽이면 일찍 일어나 산을 오르곤 했는데 산을 오르다 보면 여러 가지 뜻하지 않은 일들이 일어나 시간을 소모하곤 한다. 어떤 때는 들개나 산고양이들을 만나 산을 헤매기도 하고 어떤 때는 새벽부터 버섯을 만나 버섯을 따는데 시간을 보내기도 한다. 전쟁 직후 산자락에 가면 묻혀있던 시신 일부가 드러나 섬뜩 놀래는 일이 잦아 새벽에 산에서 사람을 만나는 일에도 마음을 조이기도 한다.

1970년대 초반으로 기억된다. 마침 그날은 쉬는 날이라 새벽등산을 포기하고 아침이 들 무렵 산을 올랐다. 산을 오르는데 길을 택하지 않고 풀숲을 헤쳐나가길 좋아하는 습관이 있어 그 날도 숲을 헤쳐 이슬을 털며 앞으로 나가는데 별안간 머리끝이 쭈뼛쭈뼛 곤두서는 것을 느꼈다.

나도 모르게 전진을 중단하고 주위를 살폈다. 그랬더니 한 소나무가지에 점퍼가 걸려 있는 것을 발견했다. 아침이니까 누가 웃통을 벗어 놓고 변을 보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리고 지나쳤는데 아무런 인기척도 없었다. 걸음을 멈추고 나는 변을 보고 올만큼의 시간을 그 곳에 주저 않아 기다렸다. 주인공이 나타나지 않아 난 나도 모르게 점퍼 곁으로 갔다. 점퍼는 오늘 걸어 놓은 것으로 확인됐다.

이슬도 묻지 않은 보송보송한 채였다. 점퍼를 두 손으로 훑어 내리니 호주머니 부분에 잡히는 것이 있었다. 안에 편지처럼 접힌 것을 여는 순간 난 질식할 듯 숨이 막혔다.
유서였다. 순간 주변을 둘러보니 냇가에 있으리란 생각이 미쳤다. 난 점퍼를 손에 걸치고 주인공을 찾기 위해 냇가로 갔다. 홀로 앉아 있는 주인공을 바로 발견했다. 나는 그를 발견하자 살아있다는 것에 고마움을 느꼈다. 그와 거리를 두고 냇가로 내려서 자갈을 잔뜩 호주머니에 담고 그가 앉아 있는 뒤의 바위 위로 올라갔다.

그를 내려다보니 소주병을 옆에 놓고 손에는 알약을 들고 있음이 확인됐다. 난 산에 오르는 걸 단념하고 그와의 ‘죽음의 게임’을 벌이기로 작정했다. 그가 막 손에 든 알약을 입으로 가져가려는 순간 난 준비한 돌멩이를 그의 앞 움푹 파인 물구덩이에 던졌다. 풍덩하면서 손에 든 약을 바위위에 떨어뜨렸고 물은 움솟았다.

그는 주위를 두리번거리더니 한참만에 약들을 주워 모으기 시작했다. 그리고는 다시 자리에 앉더니 소주를 한 컵 따라 입에 넣고 다시 약을 먹으려고 했다. 난 그의 의지를 꺾기 위해 한 번 더 자갈을 던졌다. 거의 두 시간은 기다렸을까. 그는 또 약을 먹으려는 시도를 했다. 난 이제 더이상 견딜 수가 없어 하는 수없이 소리쳤다.

“잠깐!” 바위를 내려온 나는 그의 가까이 가서 그의 등허리를 잡았다. 그는 맥빠진 사람처럼 약을 든 채 일어섰다. 난 약을 빼앗고 그의 옷을 내밀었다. “이거 당신거요?” 그는 대답대신 고개만 끄덕였다. 난 옷을 그의 어깨에 걸쳐주고 자초지종을 물었다.

그는 다섯형제가 모두 자살해 자기도 하는 수없이 죽으려 했다는 것이었다. 호적에 형제들이 자살한 기록이 남아 취직을 할 수도 없고 동료들도 외면해 이젠 기댈 곳도 없다고 했다. 나는 그를 데리고 집에 와 아침 아닌 점심을 차려주고 미아리에 아주 싼 방을 마련, 며칠간 먹을 수 있는 쌀과 라면, 그리고 반찬을 마련해 줬다.

그 다음날, 그 친구의 취직을 위해 영등포에 있는 아주 가까운 친구가 경영하는 공장을 찾았다. 그리고 딱한 사정을 얘기하고 무조건 받아 줄 것을 요구했다. 이렇게 그는 평생 처음 취직을 했고 살아가는 재미를 느끼게 됐다. 그는 늦게까지 일을 하면서 일의 재미를 느끼게 됐고 돈도 차곡차곡 저금해 몇 년후에 결혼도 했다.

공장이 점점 번창해지자 그는 공장장의 직함을 얻더니 그 공장 운영자인 친구의 도움으로 같은 유형의 공장을 차리게 됐고 어엿한 중소기업의 사장이 됐다. 죽음이란 순간이다. 삶도 순간순간이 이어져 나가는 것이다. 그는 그 후 “산다는 것은 늘 갈등과 투쟁의 연속이며 이것을 유발하는 장애 요인을 극복해 나가는 것이 곧 인생”이라고 나에게 자신만만하게 말했다. 그렇다. 인생의 멋과 맛을 삶을 부정적으로 여기지 않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난 그를 통해 배울 수 있었다.

작년엔 막내가 결혼한다고 청첩장이 와서 가보니 그의 얼굴엔 40여년전 보이던 죽음의 그림자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그는 ‘용감한 사나이’로만 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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