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것을 보존하고 다듬는 것이 나의 임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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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것을 보존하고 다듬는 것이 나의 임무”
  • 김미진 기자
  • 승인 2012.01.12 17:12
  • 호수 283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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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것 지키기’ 삼매경에 빠진 종합예술꾼 최낙영
최낙영 씨는 극단 남해가 공연한 '흑마늘 별주부전'의 연출을 맡기도 했다.

긴 생머리를 하나로 질끈 묶은 머리 위에는 항상 선글라스가 깃털장식처럼 달려있는 모자가 얹어져 있다. 옷은 언제나 하얀 바지저고리에 옥빛 배자 차림. 누구든 ‘기인’이라고 인정할 법한 최낙영 씨(46·고현 대곡)의 외양을 묘사한 것이다. 그의 기묘ㆍ특별함은 바깥 모양새뿐만이 아니다.
분명 처음 알기로는 ‘농악인’이었는데, 그 다음 다시 보면 ‘기획자’가 되어있고, 그 다음은 또 ‘연출자’가 되어있다. 심지어 굿을 벌이는 무속인이 되기도 한다. 알면 알수록 헷갈리는, 아니 더욱 알고 싶어지는 그다.


전공은 ‘농악’인 ‘종합예술꾼’


“나도 내가 무슨 일을 하는지 모르겠어요”
참을수 없는 궁금증에 최낙영 씨에게 정확하게 무슨 일을 하고 있는지 물으니 이런 대답이 나온다.

그는 본디 농악인이다. 조금 더 자세히 말하자면 중요무형문화재로 지정돼 있는 ‘이리농악’ 이수생으로 ‘쇠잡이’다.

농악인인 그가 이렇듯 기획과 연출까지 폭넓게 아우르게 된 이유는, 그의 말을 빌자면 ‘살아남기 위해서’였다.

“어떤 누가 나에게 자기의 목표는 살아남는 것이라고 했어요. 나 역시도 그런 것 같아요. 살아남으려고 하다보니까 전공이 아닌 것, 이것저것을 하게 된거죠”

생활을 위해 돈이 필요했던 그는 공연 스태프를 해달라고 하면 스태프를 하고 기획을 해달라고 하면 기획을 하고, 진행을 해달라고 하면 진행을 했다. 솥단지 들어주는 작은 일부터 시작해 항상 공연무대의 현장 구석구석에 있었던 그는 학교에서 배우고 책에서 배운 어느 누구보다도 문화예술공연과 무대를 꿰뚫어보게 됐다.

그는 최근 성황리에 공연을 끝낸 극단 남해의 ‘흑마늘 별주부전’과 ‘조선의 큰별, 노량에서 지다’의 연출을 맡기도 했다.


수치심으로부터 시작된 길

최낙영 씨가 이렇듯 종합예술꾼으로서의 길을 걷게 된 것은 사실 그리 오래되지 않았다.

마산에서 살던 그는 당시 어지럽던 국내 정세와 시민의식에 회의를 느껴 이민을 가려고 생각하고 있었다. 이에 그를 비롯한 온 가족은 캐나다 출신의 원어민 과외교사에게 영어를 배웠는데, 그는 어느날 문득 원어민 과외교사에게 부끄러움을 느꼈다고.

“우리가 입고 쓰는 거의 모든 것들이 서구의 문화를 받아들여 이뤄진 것들이잖아요. ‘아! 나는 말만 한국말을 하고 글만 한글을 쓴다 뿐이지 외국인과 다를바 없었구나’라는 생각이 들었죠. 그리고 캐나다에 비하면 그 모든 것들의 수준은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것이 당연하잖아요. 그게 부끄러웠어요. 그래서 원어민 교사에게 한국은 후진국이 아니고 어느곳에도 뒤지지 않는 한국 고유의 아름다운 문화가 있다는 것을 꼭 보여주고 싶어졌죠”

이에 그의 가족들은 계획했던 이민을 취소하고 2000년 즈음 한 대학의 평생학습강좌로 ‘소리’부터 시작해 국악을 배우기 시작했다. 최낙영 씨는 그중 ‘농악’에 뜻을 두고 연습에 연습을 거듭하면서 지금에 이르게 된 것이다.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최낙영 씨가 남해에서 문화예술활동을 하면서 답답함을 느끼는 것이 하나 있다. 바로 연습공간이 없다는 것이다.

“문화예술회관 지어준다 말 많지만, 삐까뻔쩍한 공연장을 만들면 뭐합니까. 그 공간을 사용할 사람이 없는데. 무형예술이라는 것이 하루아침에 되는 것이 아니잖아요. 계속적으로 연습을 하고 개발을 해야하는 것인데, 남해에는 마음 놓고 연습할만한 공간이 거의 없습니다. 연습을 해야 작품을 만들고 최종적으로 공연을 올릴 수 있는 거 아닙니까”

그는 무형예술을 하는 군내 모든 사람들의 염원은 문화예술회관 건립이 아닌, 먼저  연습공간을 가지는 것이라 말한 뒤 무형예술인을 도박꾼과 같다고 비교한다.

“도박하는 사람들은 저 시골에 비닐하우스까지 찾아가서 하지 않습니까. 우리도 같습니다. 좋은 시설을 원하는 것이 아니라 말뚝 네 개 치고 비닐만 덮어놓은 공간이라도 좋으니 우리가 자유롭게 창작할만한 곳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우리나라가 싫어 외국으로 떠나려고 하다가 가장 우리스러운 것을 찾게 된 엉뚱함(?)을 보이다가도 또 어느 때는 굉장히 진지하다. 아무도 생각할수 없는 특이한 비유법으로 재미있게 말을 이어나가도 또 어느 때는 독한 말도 서슴없이 내뱉는다. 강한 것 같다가도 한없이 약한 모습을 보이기도 한다.

꽤나 오랜시간 이야기를 나눠 본 최낙영 씨는 이렇듯 가늠하기 어려운 사람이었다. 하지만 수없이 오고 간 많은 말 속의 그의 참뜻은 쉽게 가늠할 수 있었다. 그건 우리나라와 남해의 전통 모든 것을 포함한 ‘우리것’을 지키고 발전시켜나가고 싶다는 욕심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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