식량부족한 주민들에게 곡식 지원한 조상의 정신 높이 기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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식량부족한 주민들에게 곡식 지원한 조상의 정신 높이 기려
  • 한중봉 프리랜서기자
  • 승인 2013.03.22 16:25
  • 호수 34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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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남(入南) 성(姓)씨 발자취를 찾아서 3 - 김해김씨 경파후손 석성공파 가천문중

▲ 가천문중의 통사랑겸선공감역을 지낸 바 있는 천석꾼 능배(能培)손이 구내 식량이 부족한 주민들에게 곡식을 나눠준 것을 기록한 문서. 문중에 따르면 7년에 걸쳐 남해 곡식을 지원한 것이 2천여 가구가 된다고 한다.
김해김씨 경파후손 석성공파 남해가천문중은 김해김씨(金海金氏) 김녕군(金寧君) 경파(京派) 휘목경(諱牧卿)의 7세손 석성공(石城公) 휘영순(諱永純) 파(派)후손으로 시조 김수로왕 64세, 중시조 석성공파 14세, 후손인 휘세규(諱世奎) 자상보(字相甫)가 살기 좋은 곳을 찾아 전국방방곡곡을 찾아다니다가 정확한 년도는 알 수 없으나 약 4백년 전에 따뜻하고 물 좋고 산 좋은 남면 가천에 자리를 잡아 살았다고 알려지고 있다.

입남 1대 조상 세규 묘지는 남면 평산리 오리마을 우지막골에 있었고 그의 후손들도 남면 임포마을, 운암마을, 가천마을, 남해읍 아산마을 등 각처에 흩어져 있는데 지금 살고 있는 후손들이 2000년도에 가천마을 뒷산 문중산에 문중묘지를 조성해 조상묘지를 모두 한 자리에 이장 안치했다고 한다.

가천문중은 입남시조 세규(世奎, 중시조14세) (이후 세대는 중시조의 후손으로 소개함) 후손으로 승후(承厚, 字 厚男, 15세), 두산(斗山, 字 后山-16)세, 명현(命鉉,字 命卜, 17세), 제신(濟信, 字 士彬, 18세), 연식(衍植, 字 德順, 19세), 현구(顯九, 字 龜瑞, 20세)의 종손으로 내려왔으며, 아들 연배(練培, 字百鍊), 능배(能培, 字百能), 도배(道培, 字百道), 세 사람(21세)의 후손으로 28세까지 출생해 현재 가천과 남해읍 등 전국 방방곡곡에 살고 있고, 일본까지도 살고 있다,

가천문중 후손 대부분은 대도시로 떠나고 집성촌이라고 하는 가천마을에는 주로 노령자 20여 호가 농사를 이어 가고 있다. 집성촌인 가천마을에 살고 있는 후손들은 매년 음력10월 첫째 주 일요일에 입남 시조를 비롯해 후손 21세까지를 대상으로 해 시제를 지내고 있다. 이때는 고향을 떠나 타지에 살고 있는 후손들도 참석해 조상을 숭배하고 후손들끼리 화합하고 있다고 한다.

내려오는 말에 의하면, 후손들 중에 자랑스럽고 가문을 빛낸 사람들이 많이 있다고 하나 기록이 남아있지 않아 소개하기가 어렵다고 한다. 다만 현재 족보에 기록돼 있거나 명확하게 알고 있는 사람을 소개하면, 17세손 명헌(命鉉)은 노직통정대부(老織通政大夫). 18세손 제신(濟信)은 증가선대부(贈嘉善大夫). 20세손 현구(顯九)는 부호군(副護軍). 21세손 능배(能培)는 통사랑겸선공감역(通仕郞兼繕工監役). 22세손 종준(鍾俊)은 행현령위차정사대동도감(行縣令爲差定事大同都監). 24세손 학선(鶴宣)은 잠수기조합장. 25세손 문기(文起)는 6·25무공수훈국가유공자, 종철(鍾轍)은 행정가로서 서기관과 남해군의회 부의장. 준형(俊炯)은 국제통운(주)서울지점장. 태두(太斗)는 경남도청 국장, 일두(日斗)는 세무서 과장, 26세손 봉주(鳳柱)는 근로복지공단 근무. 정훈(正勳)은 의사, 봉헌(鳳憲)은 국민은행 부장, 두식(斗植)은 민주화국가유공자. 두경(斗景)은 학교법인동아학숙재단참사 총무과장. 영수(暎秀)는 육군대령, 현준(賢準)은 고용노동부본부 근무 등 자랑스러운 인재가 많다.

특히 21세손 능배(能培) 휘백능(諱百能) 자화원(字和遠)은 통사랑겸선공감역을 지냈고 재산은 천석으로 가천에서 읍에까지 남의 땅을 밟지 않고 다녔다고 한다. 현재 가문에서 보관하고 있는 문서기록에 의하면, 식량난이 극심했던 병술년, 을류년, 갑신년, 정축년, 계유년, 갑술년, 을축년, 기미년, 계축년 등 7년에 걸쳐 남해 방방곡곡에 식량이 부족한 주민을 조사해 곡식을 지원했는데 그 호수가 2천여 가구가 된다고 한다. 가문에서 보관하고 있는 문서가 훼손되었거나 잃어버린 것이 많아서 당시 배고픔을 해결한 것이 얼마나 되는 줄은 모두 알 수가 없으나 다만 곡식을 수확하면 남겨두지 않고 다 나누어 줄 정도였다고 한다. 굶주림을 해결한 주민들이 아름다운 미덕을 오래토록 기리기 위해 감사의 표시로 만든 비석이 군내 곳곳에 많이 세워져 있었으나, 새마을 사업 등으로 지금은 모두 철거돼 아쉬움이 크다는 것이 문중관계자의 이야기다.

문중소개를 맡아 준 김종철 씨는 “문중에서는 지금까지 남아있는 재산인 산을 개발해 소득사업을 연구 검토하고 있다”며 “공동사업으로 추진한 문중묘지 조성 등을 볼 때 어떤 일이든지 시작하면 모두 참여하는 가문의 화합과 단결이 좋은 것이 우리 문중의 자랑이므로 공동소득사업도 성공 할 수 있을 것으로 전망하고 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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