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동·삼동 등지에 후손들 번성 … 다양한 분야에서 가문 빛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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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동·삼동 등지에 후손들 번성 … 다양한 분야에서 가문 빛내
  • 한중봉 프리랜서기자
  • 승인 2013.08.30 14:49
  • 호수 36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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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남성씨 발자취를 찾아서 15 경주최씨(慶州崔氏)남해종친회

▲ 이동 초곡마을 입구에 있는 경주최씨 제각
성씨의 역사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 의하면 삼한시대 진한 사로(斯盧) 6촌의 하나인 돌산고허촌 촌장 원조 소벌도리(蘇伐都利)는 박혁거세를 양육해 왕으로 추대하고 천강인(天降人)으로 신라 건국에 큰 공을 세워 개국 좌명공신(佐命功臣)이 된 인물이다.

서기 32년 돌산고허촌(突山高墟村)이 사량부(沙梁部)로 개편되며 최씨(崔氏) 성을 받았고 516년에 사량부 대인(大人)에서 충선공(忠宣公)으로 시호(諡號)됐으며, 658년에 문열왕(文烈王)에 추봉됐다. 경주최씨는 문열왕 최소벌도리공을 득성시조(得姓始祖)로 모시고 있다.

문열왕 최소벌도리공이 경주최씨의 득성시조라면 문열왕의 24대손인 ‘한문학의 시조’ 최치원(崔致遠)은 경주최씨의 중시조(中始祖)다.

신라 대표지성 최치원은 당나라에 유학해 18세에 빈공과에 장원 급제했다. 같이 유학한 최승우도 890년에 과거에 급제해 학문과 문장을 날렸고, 최언위는 885년 급제 후 집사성 시랑을 지내고, 고려 개국 시 삼한벽상공신으로 태자사부, 문한, 평장사를 역임했다. 중국의 과거에 급제한 3천재를 ‘신라3최’라 불렀고 최씨 가문은 중국의 과거에서 가장 많은 급제자를 배출했다.

경주최씨는 고려에 와서는 문벌귀족 권문세족으로 광종 때 태자태사 문하시중을 지낸 최량, 성종 때 대를 이어 문하시중을 지냈고 ‘시무28조’를 올린 최승로(崔承老), 최숙(崔肅), 최제안(崔齊顔), 현종 때 검교태부수문하시랑 최항(崔沆), 충숙왕 때 성균관 대사성을 지낸 최해(崔瀣), 명종 때 정당문학을 지낸 최여해(崔汝諧) 등의 인물을 배출했다.

조선에 와서도 동학을 창시한 최제우(崔濟愚), 동학 2대 교주 최시형(崔時亨), 한말의 거유(巨儒)이자 의병장으로 활동하다 순국한 최익현(崔益鉉), 일제 강점기 겨레의 스승이며 독립운동가인 한글학자 최현배(崔鉉培) 등과 같은 많은 학자, 훌륭한 신하, 지도자를 배출한 씨족이자, 삼한 신라시대 이래의 전통적 명문집안이다.

분적종 및 분파

앞서 밝힌 대로 최씨들은 원조 최소벌도리공과 24대손 시조 최치원을 중심으로 상하대에서 분적, 분파됐는데, 통일신라 때 한반도 전체로 번창해 고려말경 문헌상 386여 본까지 확대됐다가 다시 통폐합돼 현재 시조가 확인되는 본관은 45여개이다.

 한국최씨의 대종가 경주최씨는 26파로 나뉘는데, 관가정공파(觀稼亭公派), 광정공파(匡靖公派), 정랑공파(正郞公派), 사성공파(司成公派), 화숙공파(和淑公派), 충렬공파(忠烈公派) 등 6대파를 주축으로, 2100여 년 간 세계를 이어 오는 삼한시대 기원 삼한갑족(三韓甲族)으로 80여세의 대종(大宗)을 이루고 있다.

입남조와 후손들

경주최씨 가문의 입남조 옥동(玉東)은 중시조 최치원의 15세손으로 지금으로부터 대략 400여년 이동 초곡으로 옮겨와 산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당시 웅천현감을 지낸 것으로 기록돼 있으나, 왜 어떻게 입남했는지는 정확히 알려지지 않고 있다.

남해의 집성촌으로는 삼동 영지ㆍ은점ㆍ대지포ㆍ동천, 이동 난음ㆍ초양ㆍ초곡, 서면 중리ㆍ유포, 상주면 상주, 남면 상가ㆍ우형 등이 있다.

이들은 1950년대에 이동 초곡저수지 부근에 영모재(永慕齋)란 재실을 건립하고 매년 음력 10월 10일 시제를 모셔오고 있다.

경주최씨 남해집안에서는 사회적으로 널리 알려진 사람이 적지 않다. 그 중 먼저 고인이 된 분으로는 최용철 수산청 어전국장, 치안정감을 지낸 최남수, 최익수 경남도평의원, 최욱진 도의원, 최경근 삼동면장, 최철만 삼천포수협장, 최익명 남해고 설립자 등이 있다.

생존해 있는 인물로는 최봉구 13대 국회의원, 최평욱 보안사령관, 최영태 주택은행부행장, 최민신 군의원, 군민대상을 수상했던 최봉민(현 종친회장), 면장을 역임한 최춘옥, 최종원 축협장, 최인관 국무총리비서관, 최면헌 기획감사실장, 최광배 교장, 최춘봉 상주초 교장(종친회 부회장), 남해고 최봉갑 교장, 최계주 교장, 최상수 교장, 최성기 해성고 교장, 최태용 이동중 교장, 최명포 남해신협 이사장, 최균재 강원산업 대표, 한의사 최균철, 최병헌 삼동면장, 최창렬 동남해농협 상임이사, 최정윤 새남해농협 상무 등이 있다. <전현직 무관/ 무순임>

최봉민 남해군종친회장은 “우리 집안의 종원들 모두 조상모시기를 개을리 하지 않고 있으나 여느 문중처럼 젊은 후손들의 참여가 부족해 아쉬움을 가지고 있다”며 “명문거족의 후손으로서 큰 자부심을 가지고 모두들 집안 종사에 힘을 보태주길 바란다”고 말했다.


한국판 ‘노블리스 오블리제‘ 경주 최부자
’10대 진사, 12대 만석, 400년 보시‘ 실천해

우리나라의 노블레스 오블리제(특권계층의 사회적 책임)하면 제일 먼저 떠오르는 집안이 경주 최 부자다. 이 집안의 신조어가 바로 둔차(鈍次)였다. 둔차란 어리석은 듯 드러내지 않으면서도 버금감을 나타내는 말이다.

부부삼대(富不三代) 권불십년(權不十年)이란 말이 있듯이 부와 권력은 고금을 통해서 오래도록 유지해 나가기가 어려운 법이다. 최 부자 집 역시 집안에 완전한 복을 갖추기는 어렵듯이 후손이 없어 양자를 들이기도 하고, 과거에 낙방하는 후손도 있었다고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집안이 오랜 기간 부와 명예를 지키며 남들로부터 칭송을 받았던 연유는 무엇일까?

최씨 집안에는 전통적으로 내려오는 제가(齊家)의 가훈 ‘육훈(六訓)’과 자신의 몸을 닦는 수신의 가훈인 육연(六然)이 있다.

육훈은 ‘진사이상의 벼슬을 하지마라’ ‘만석이상의 재산을 모으지 말며 만석이 넘으면 사회에 환원하라’ ‘흉년에는 남의 땅을 사지마라’ ‘과객(過客)은 후히 대접하라’ ‘며느리들은 시집온 뒤 3년동안 무명옷을 입혀라’ ‘사방 100리 안에 굶어주는 사람이 없게 하라’는 것이다.

육연은 ‘스스로 초연하게 지내고’ ‘남에게 온화하게 대하며’ ‘일이 없을 때는 마음을 맑게 가지며’ ‘일을 당했을 때는 용감하게 행동하고’ ‘실의에 빠졌을 때는 태연히 행동하라’것이다.

실제 최 부잣집은 한해 생산되는 쌀의 1/3은 자신들이, 1/3분은 과객의 대접에, 1/3은 빈민의 구휼에 힘썼다고 한다.

이 뿐만 아니라 1884년 경주에서 태어난 미지막 최부자인 최 준은 단순한 부자가 아니라 상해임시정부에 평생 자금을 지원한 독립운동가였다. 또한 1947년에는 대구대학을 설립해 현대 교육에 큰 족적을 남기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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