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마지막 임금 공양왕과 순비, 세자 왕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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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의 마지막 임금 공양왕과 순비, 세자 왕석
  • 김성철
  • 승인 2013.09.05 15:45
  • 호수 36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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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철 관장의 유배로 읽는 한국사 59

남해유배문학관 관장
“경이 없었다면 내가 어찌 왕이 됐겠는가. 경의 공덕을 내 어찌 잊으리오. 하늘과 땅의 신령이 위와 곁에 있으니 자손대대로 서로 해치지 말 것이다”

1392년 7월 12일, 이성계에게 두려움을 느낀 공양왕은 이성계의 집에서 서로 해치지 말자는 동맹을 맺자고 제의했다.

공양왕이 이성계와 서로 해치지 말자는 동맹을 논하며 주연을 베풀고 있는 사이에 배극렴, 조준, 정도전, 남은 등의 신료들은 왕대비궁으로 발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왕을 폐위시키기 위한 요식절차를 밟기 위해서였다.

왕대비 역시 고려의 국운이 다했음을 직감하고 있었기에 윤허하지 않을 수 없었다. 왕대비는 공민왕의 제4비 정비 안씨였다. 왕비에 간택된 후 그녀는 파란만장한 삶을 살았다. 젊은 시절 왕비자리에서 쫓겨난 후 다시 궁궐로 돌아온 그녀는 공민왕 명령을 받은 홍륜, 한안 등의 겁탈을 피해 머리를 풀고 목을 매 죽으려고까지 했다.

공민왕이 죽은 후 우왕 역시 하루에 몇 번씩 그녀를 찾았다. 하지만 그는 추악한 소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정조를 지키고 왕대비 자리에 남았던 것이다. 그런 정비 안씨도 흐르는 역사의 물줄기를 거스를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녀는 4일 후 이성계 옹립전교까지 내렸다.


“지금 왕이 혼암(昏暗)하여 임금의 도리를 이미 잃고 인심도 이미 떠나갔으므로 사직과 백성의 주재자가 될 수 없으므로 왕의 자리를 폐하노라”

“내가 본디 임금이 되고 싶지 않았는데 여러 신하들이 나를 강제로 왕으로 세웠습니다. 내가 성품이 불민하여 사기를 알지 못하니 어찌 신하의 심정을 거슬린 일이 없겠습니까?”

신하들의 인기투표에 의해 어쩔 수 없이 왕이 되었던 공양왕은 눈물을 흘리며 자신을 옹립했던 신하들에 의해 쫓겨나야 했다. 이성계와의 동맹 초안의 먹물이 마르기도 전인 바로 그날 궁에서 쫓겨나 원주 유배길을 떠나야 했다.

왕건이 고려를 세운지 475년, 서른네 번째 마지막 임금 공양왕은 무더운 여름날 순비 노씨와 세자 왕석과 함께 원주로 향했지만 아무도 그들의 행렬을 알아보지 못했다.


하룻밤 사이에 갑자기 벌어진 폐위와 유배형이었기에 궁궐안의 사람들만 알 수 있었다. 유배길을 걷는 공양왕의 눈에는 극심한 가뭄에 타들어 가는 논밭을 바라보며 한숨짓는 농부들의 가여운 모습만이 보일 뿐이었다.

지난 4년간 왕으로 있으면서 이성계의 눈치만 보면서 삶의 끈을 놓지 않으려 했던 우유부단함이 낳은 결과라 생각하니 한심할 따름이었다.


47세에 폐위되어 원주로 유배된 공양왕은 얼마 되지 않아 간성군(강원도 고성군 간성면)으로 유배지를 옮겼다가 다시 삼척으로 이배되었다.

공양왕은 자신이 폐위된 후 국정을 대신 보던 감록국사 이성계가 7월 17일 새로운 왕이 되었다는 소식을 들어야 했다.
 
그리고 고려의 국호가 조선으로 바뀌었다는 비보를 전해 들어야 했다.  폐위된 후 공양군으로 강등된 공양왕은 1394년 4월, 이성계의 명령에 의해 50세를 일기로 삼척에서 사약을 받았다. 1416년(태종 16)에 공양왕으로 추봉되었다.

창성군 노진의 딸 순비 노씨 역시 공양왕과 함께 유배되어 왕을 따라 유배지를 옮긴 후 공양왕과 함께 죽었다.

공양왕과 순비의 무덤은 경기도 원당과 강원도 삼척 두 곳에 있다. 공양왕의 아들 왕서 역시 부모들과 함께 유배생활을 하다 삼척에서 함께 죽음을 맞이했다.

거제도 유배 후 경주에서 살해당한 의종, 유배 중 중국 호남성 악양에서 비명횡사 한 충혜왕, 강화도 유배지에서 삼촌인 공민왕에게 독살 당한 충정왕, 강화도에서 살해당한 우왕과 창왕 그리고 공양왕까지 유배라는 비운을 겪은 고려왕들은 모두 유배지에서 삶을 마감해야 했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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