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좋은 기사’ 쓰도록 ‘좋은 일’을 만들어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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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좋은 기사’ 쓰도록 ‘좋은 일’을 만들어 달라
  • 김태웅 기자
  • 승인 2013.09.12 12:55
  • 호수 36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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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변(辯)이 있나

요즘은 신문을 만들고 나면 찝찝하다. 최근 장애인복지계의 좋지 않은 소식을 자주 전하게 돼 기분이 영 좋지 않다.

특히 기자의 보도 자체에 대해서 이러하다는 둥 저러하다는 둥 ‘말’이 많아 머리가 매우 뒤숭숭하다. 일이 손에 잡히지 않을 정도다. 뒤죽박죽 엉킨 생각들을 쏟아내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어 썰을 푼다.

그동안 많이 들었던 말들 중 가장 답답했던 몇 가지 이야기를 꼽자면 ‘좋지 않은 소식 전하지 말라’다. 장애인복지계의 좋지 않은 모습이 비춰지게 되면 장애인에 대한 인식이 안 좋아 진다는 이유다.

이뿐만이 아니다. 행정을 탓하게 되면 공무원은 지적을 받지 않기 위해 복지부동하게 될 것이며 장애인단체는 복지사업(행정으로부터 보조금을 지원받는) 진행에 차질을 빚을 수 있단다. 잘 풀릴 일을 신문 기사가 ‘독(毒)’이 되어 망칠 수 있으니 보도를 하지 말든지 수위를 낮춰 달라는 등 오히려 기자에게 화살을 돌린다.

농사도구인 호미가 범죄도구로 이용될 수 있다고 대장간에 호미를 만들지 말든지 날을 뭉툭하게 만들라고 할 기세다. 그런 요구를 기자가 무조건 수용한다면 언론은 사라져야 한다. 언론에는 여러 기능이 있지만 가장 기초적인 역할은 소식을 전달하는 것이다.

기자도 기본적으로는 많은 사람들의 알권리를 위해 소식을 전하는 ‘뉴스 메신저’다. ‘대안’은 고사하고 ‘있었던 일’ 조차 보도를 하지 못하는 언론이 무슨 언론이겠는가.

군민들의 혈세로 사업을 진행하는 단체가 무슨 일을 하는지, 어떻게 진행하는지 군민들이 알지 못하게 하려는 것인가? 사람들의 눈과 귀를 막을 셈인가, 언론 존재 자체를 뒤흔들 셈인가?

‘보도를 하지 않던지 수위를 낮춰 달라’… 기자에게 쉽게 할 말은 아니다.

또, 답답한 언사 중 하나는 ‘누구 허락받고 기사를 냈는가’다. 이는 그릇된 언론관에서 비롯된 말이라 보이므로 이 기회에 확실히 짚고 넘어가야 할 필요가 있겠다.

헌법에서는 언론의 ‘취재권’과 ‘보도권’을 보장하고 있으며 그것이 ‘언론의 자유’다.

국민의 세금이 들어가는 곳이면 어디든지 감시대상이다. 허락을 받아야 보도를 할 수 있다면 사회단체, 단체장이나 공직자의 실책 등은 그 어떤 언론매체에서도 볼 수가 없을 것이다.

누가 자신의, 자기단체의 치부를 허락하겠는가. 이는 이해를 돕기 위해 든 극단적인 예지만 단체장이 법을 초월하는 존재는 아니라는 것은 세 살 먹은 아이도 아는 사실이다.

끝으로 언론 탓이다.

잘되면 내덕이고 잘 못되면 조상 탓이라고 잘 안되면 무조건 언론의 잘못이란다.

못생긴 자신의 얼굴은 생각안하고 거울만 탓하고 있으니 참으로 답답한 노릇이다.

언론에서 잘못 보도한 부분이 있으면 건전한 비판과 정정 보도를 요구하면 되고 억울한 일이 있으면 모든 것을 투명하게 공개하고 적극적으로 해명하면 될 것 아닌가.

제발 근거 없는 억지 좀 부리지 말아 달라.

뭐 좋다. 위의 모든 말들을 모두 부탁이라고 하자. 아니, 부탁이 맞을 것이다. 기자가 내공이 부족해 부탁을 ‘압박’으로 확대해석해 받아들인 것이리라. 해서, 기자도 부탁이 있다.

‘좋은 기사’를 쓰고 싶은데 ‘좋지 않은 일’을 ‘좋은 일’로 포장하는 능력이 기자에게는 없다.

‘좋은 기사’를 쓸 수 있도록 ‘좋은 일’을 만들어 달라고 진심으로 부탁드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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