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인지, 취중에 세조를 꾸짓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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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지, 취중에 세조를 꾸짓다
  • 남해타임즈
  • 승인 2014.01.23 11:52
  • 호수 3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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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철 관장의 유배로 읽는 한국사 77

김 성 철
남해유배문학관 관장
 "천지자연에 소리가 있다면 반드시 그에 맞는 글이 있어야 한다(有天地自然之聲 則必有天地自然之文)"

 국보 제70호 룗훈민정음 해례룘 에 기록된 정인지의 서문 첫문장이다. 룗훈민정음 해례룘 의 서문을 정인지가 썼다는 것은 한글 창제에 참여한 학장 중에서 정인지가 중심인물이었음을 증명하고도 남음이 있다.

 조선 최고의 지식인 중 한 사람인 정인지는 세종, 문종, 세조, 예종, 성종 등 6명의 임금 아래서 31년간 화려한 관직생활을 하면서 82세까지 천수를 누렸다.

 하지만 계유정난 때 수양대군의 편에 선 이유로 역사적 평가는 엇갈리고 있다. 김종서를 베고 안평대군을 몰아내는 일에 적극 가담했으며, 성삼문 등 사육신을 죽음으로 몰아넣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난한 집에서 태어나 고리대금업을 하는 등 이재에 밝아 장안 제일의 갑부라 불리며 비난을 받기도 했다.

 한명회 등과 함께 세조의 최측근으로 영의정의 자리까지 오른 정인지도 유배라는 부침을 겪는다. 정인지는 세조가 불교에 의지하는 마음에 불만이 있었다. 하지만 대놓고 반대할 수는 없었다.

 1458년 2월 12일 날씨가 풀리자 세조는 중삭연(仲朔宴)을 베풀었다. 중삭연은 4계절의 가운데인 음력 2월, 5월, 8월, 11월에 임금이 신하를 위로하는 정기적인 잔치였다. 잔이 돌고 술기운이 완연해지자 세조는 중신들에게 춤을 권했다. 춤을 추던 정인지는 춤을 멈추고 세조를 향해 외쳤다.

 "전하, 지금 같아서는 이 나라를 하루도 보전할 수 없사옵니다. 성상께오서 주자소에 룗법화경룘 등 여러 경을 수백 벌 인행(印行)하게 하였고, 또 룗대장경룘 50벌을 인행했사옵니다. 그런데 또 룗석보(釋譜)룘를 간행하시니 아무리 생각해도 옳지 못한 일이옵니다"

 연회장의 분위기는 싸늘해졌다. 예순여섯의 영의정과 세조 사이에는 무거운 침묵이 흐렀다. 이것으로 잔치는 끝나고 말았다. 다음날 세조는 정인지에게 부처의 도리와 유학의 도리를 물었지만 정인지는 취중의 일이라 기억할 수 없다는 대답만 했다. 의금부에 하옥된 정인지는 다음날 석방되었다. 좌의정 정창손 등이 수차례 죄를 청했지만 세조는 정인지를 용서했다.

 7개월 후인 9월 15일 세조는 경회루에서 양로연(養老宴)을 베풀었다. 그리고 정인지에게 지난 2월을 일을 되물으면서 앞으로 불사를 더 일으켜 비명에 죽은 사람을 위로하겠다고 했다.

 "그대는 무슨 말을 하는가? 옛날부터 그렇게 가르쳐도 유학의 도리를 모른다는 말인가? 그대의 생각을 나는 한 가지도 취하지 않겠네."

 정인지는 취기에 어린 목소리로 세조를 나무랐다. 임금을 `그대`라 하고 자신을 `나`라고 호칭한 것은 군왕과 신하의 대화가 아니었다. 막말이나 마찬가지였던 것이다. 세조는 아연실색했고, 신하들의 얼굴은 하얗게 질려 버렸다. 다음날 의정부, 충훈부, 육조가 합사하여 극형을 내리라고 주청했다. 하지만 세조는 술에 취해 실수한 것이니 공신을 벌 줄 수 없다고 끝내 용서했다.

 세월은 흘러 이듬해 8월 1일 정인지는 연회자리에서 술에 취해 세조에게 태상(太上)이라 불러버렸다. 태상은 전대의 임금이란 뜻이다. 지금의 임금이 아니라고 했으니 작은 일이 아니었다.

 세조는 또 용서하려 했지만 신하들의 주청이 너무 강해 파직시킨 후 외방종편(外方從便)이라는 유배형을 내렸다. 외방종편은 서울 이외의 지역 중 죄인이 원하는 곳에 편리한 대로 안치하는 것이다.

 세 번에 걸친 불경으로 정인지는 아버지 정흥인이 살았던 부여에 안치되고 말았다. 하지만 세조는 석 달만인 11월 6일 석방시키면서 역마를 타고 올라오게 하는 선처를 베풀었고, 12월 7일 벼슬을 할 수 있도록 고신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다음해인 1460년 10월 3일 다시 하동부원군으로 삼았다.
 <다음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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