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경하던 추억의 고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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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하던 추억의 고향
  • 김희정 기자
  • 승인 2015.09.02 10:38
  • 호수 46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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향우기고
홍 춘 표
삼동출신
시인

남해는 문화의 고장, 역사의 고장이다.

남해바다 끝자락에서 가장 먼저 만나게 되는 노량은 해상국립공원의 풍광이 아름다운 곳으로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마지막 전투를 펼쳤던 호국의 성지이다. 왕조시대에 이 나루를 건너온 수많은 유배객들에게는 원과 한이 서린 곳이지만 이 고장 사람에게는 나룻배를 타거나 도선으로 물살을 가로질러 다녀야 했던 추억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육지로부터 고립되었던 남해도(島) 군민들에게 대교 건설은 오랜 숙원이었다. 일찍이 고향을 빛낸 최치환, 신동관 의원의 선구적 업적이 없었다면 불가능 했을 것이다. 1973년에 준공 되어 어언 42년이 지났지만 남해대교는 나에게 잊을 수 없는 추억의 대상이기도 하다.

대교가 개통돼던 해, 아름다운 풍경에 매료되어 다리 위를 걷고 또 걸어보던 그때의 느낌은 아직도 잊을 수 없으며 남해대교를 배경으로 많은 홍보 사진도 찍었다. 

남해대교는 이제 명실공이 삼천포 연륙교와 함께 관문의 기능을 다할 뿐만 아니라 남해 각지에 산재한 명승고적을 찾는 관광객들의 유치와 지역사회 발전에 크게 기여하고 있다.

동양의 금문교, 천공의 구름다리인 남해대교는 언제 봐도 새롭고 웅장하기만 하다. 

충렬사가 있는 해변 어귀에는 수백여 그루의 수목이 굽이치는 바다와 현수교를 바라보고 있으며 수려한 노량의 풍경과 어우러져 가슴 속 깊이 숨겨져 있던 감동을 끌어낸다.

충렬사 정문 언덕바지에는 낡은 비가 초초히 서있다. 조선의 4대 명필 자암 김구(광산 김씨) 선생은 조선 중기의 문신이자 서예(인수체)가이다. 왕도정치를 실현하고 종전의 제도를 혁신하려다 남곤 등의 모함으로 1519년(중종 14) 기묘사화 때 31세의 나이로 남해 노량으로 귀양을 왔다. 그는 경치 좋고 아름다운 고장으로 남해를 예찬하며 화전별곡을 지었다.

1531년(중종 26) 유배 후 임피(臨陂 : 현 옥구군)로 이배(移配)되었다가 1533년(중종 28) 석방되어 향리로 돌아와 보니 그사이 부모가 모두 죽어 산소에서 통곡하다 기절까지 하였고, 이곳에 초막을 지어 시묘살이를 하다 이듬해 병이 들어 세상을 떠났다.

이렇듯 효자로도 이름난 남해의 선현인 자암 김구 선생의 높은 정신과 뜻을 기리며 낡은 비문을 새롭게 중수하거나 서원을 복원해 남해의 문화로 만들고, 자암 문학 시상제나 경필 서예대회 등을 개최해 남해를 빛낸 문화대상을 신설했으면 하는 바람이다. 우리의 토속적 문화유산에 대한 재인식이 필요한 시점이고, 이를 바탕으로 새롭게 발전시켜 나가야 한다.

추억과 낭만이 서린 곳, 시원한 바닷바람 속에 푸르디푸른 수많은 추억이 하나 둘 피어나 파도처럼 모래에 물결을 만들며 출렁인다. 무한한 세월은 전광석화(電光石火)처럼 흘러가고 내 삶의 떠나간 인생을 추슬러 본다. 소나무 숲과 굽이치는 금모래 빛 모래톱이 어우러져 아름다운 경관을 이룬 상주 모래밭. 비단 물결의 깊은 은모래 전원 마을은 남해 쪽빛 바다 물결의 솔밭 향기를 전해준다.

금산을 오르는 길에는 초목들이 해풍에 손짓하듯 한들대고 고즈넉한 산길은 빼어난 경치를 자랑하고 있다. 기암절벽과 노송이 어우러져 멋진 풍광을 자아내는 금산에서 바라보는 탁 트인 남해바다의 쪽빛 물결 또한 장관이다. 일출경은 아름답고 장엄하며 한눈에 조망되는 상주 해수욕장은 그 명성을 널리 알리고 있다.

금산은 아름다우면서 자연의 미를 그대로 지닌 기암괴석 돌 바위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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