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충돌과 갈등 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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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충돌과 갈등 ①
  • 남해타임즈
  • 승인 2019.09.16 17:19
  • 호수 6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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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욱 작가

차덕구 일가는 노량 포구 어귀에 있는 객점에서 하루를 쉬었다. 뜨끈한 국밥에 새우구이가 딸린 찬을 먹자니 그간 쌓인 피로와 억울함이 눈 녹듯 스러졌다. 역참 한 구석에서 눈칫밥을 먹고 찬바람이나 간신히 피할 허름한 마구간에서 새우잠을 잤던 지난 이십여 일에 비하면 생각지도 못한 호사였다.
물김치를 내오면서 객점의 주모가 연민이 가득 담긴 눈빛으로 그들을 위로했다.
"아이구, 우짜다가 이런 영그리 없는 섬까지 ㅤ쫓기와시꼬? 그래도 박 포교 나리 만난 건 당신들 복이 다하지 않았단 증거제. 그 양반 요서 갱본 따라 20여 리 가면 나오는 갈구지 사람이라예. 댁들 온다고 고향 집에 들러 왕새우를 한 바구니나 담아 왔지 뭐야. 많이들 들어요. 내일부턴 고생길이 열릴 테니까."
박태수라 불린 포교는 그들 일가가 객점에 든 것을 보더니 나졸들과 국밥 한 그릇에 탁배기 댓 잔을 들이켜고는 바로 자리를 떴다.
"내일 해가 중천에 뜰 오시(午時, 낮 11시~1시쯤에 오리다. 밤새 푹 쉬며 객고도 푸시고, 이곳 물정도 둘러보면서 챙겨두소. 그럼 갈라요."
박 포교는 주모에게 어한(禦寒)이 될 만한 옷가지를 챙겨주라는 당부도 잊지 않았다. 춥고 먼 길을 오느라 땟국이 흐르고 멀쩡한 데가 드문 옷차림을 한 그들의 행색은 반 짐승에 가까웠다. 몸이 북어처럼 바짝 마른 사람이라 인정이 없을 듯했는데, 지옥에서 부처를 만난 기분이었다.
차덕구 일가는 말을 타고 떠나는 박 포교의 꽁무니를 전송하면서 하염없이 고개를 조아렸다.
다음 날 포교 박태수는 정오를 넘긴 시간에 얼굴을 드러냈다. 나졸도 없는 홀몸이었다. 차덕구 일가는 간단히 요기를 하고 길을 떠났다. 포구 너머로 바로 가파른 구릉지대가 이어져 해안을 따라 걸었다. 박 포교는 말에서 내려 쉬엄쉬엄 걸으며 일가들의 발걸음에 보조를 맞추었다. 해안을 벗어나 뭍으로 이어지는 길을 오르더니 박 포교가 서쪽 바다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곳은 육지가 혹부리처럼 바다로 쑥 밀려나가 있었다.
"저기가 이락사(李落祠)라요. 충무공께서 전사하신 뒤 시신을 올린 곳이지예. 저 뻗쳐나간 끝머리에 첨망대(瞻望臺)가 있지예. 아침에 충렬사(忠烈祠)는 들릿십니까?"
늦잠을 자느라 주변을 둘러볼 짬이 없었던 차덕구는 대꾸할 말이 없었다. 우물쭈물하는 차덕구를 보더니 박 포교가 알겠다는 듯 씽긋 웃으며 더 캐묻지 않았다. 조금 더 걸으니 야트막한 고개가 나왔다.
"여기가 `가칭이`라 불리는 고개지예. 임란 때 왜놈 밀정이 우리 조선의 지세를 염탐하면서 지도를 그려갔다지 뭡니까. 그때 밀정 한 놈이 승복(僧服) 차림으로 남해에 잠입해 지도를 그릿는데, 어떤 기생이 술에 곯아떨어진 밀정의 바랑을 뒤지서 지도를 보고는 덧칠을 했답니다. 그러니까 물길이 막혀 있는 이곳을 트인 것처럼 고쳐 놨다 이기지요. 그리고 임란 마지막 해전인 노량 전투에서 왜놈 수군이 지도만 믿고 이곳으로 몰려왔다가 오도 가도 못해 몰살을 당했다네예. 백성들 지혜가 없었시몬 임란 때 승전(勝戰)을 거두지 못했을 기라예."
박 포교는 제 흥에 빠져 지명풀이에 열을 올렸다. 하지만 차덕구 일가의 눈에는 그저 낯설고 바람 부는 고개일 뿐이었다.
한참을 더 걸어가자 읍성이 모습을 드러냈다. 크게 네모난 형태로 쌓은 성이었다. 먼저 눈에 북문(北門)이 들어왔다. 옹성(甕城)과 치(雉)가 갖추어져 있었고, 사람 키 대여섯 배는 될 성벽이 기세 좋게 둘러쳤다. 성으로 접근한 적군을 토끼 몰 듯 한곳으로 몰아 섬멸할 수 있는 방어시설이었다.

어느새 해는 왼쪽으로 보이는 높은 산을 넘어가기 직전이었다. 어스름이 다가오자 차게 변한 바람이 옷깃을 파고들었다. 걸으면서 흘린 땀이 바로 한기(寒氣)를 재촉했다. 몸이 부르르 떨렸다. 박 포교가 일가를 돌아보더니 말을 건넸다.
"댁들 거처는 예서 동쪽으로 오 리쯤 가면 나옵니다. 선소(船所)라 카는데, 제법 큰 포구지예. 원래 유배인에게는 보수주인(保授主人)이라 해서 집도 한 채 내주고 죄인을 감호하는 책임을 진 이가 있긴 한데, 댁들 같은 평민 죄인들에게는 그림 속 떡이고, 관아에서 집은 마련해 두었십니다. 멀쩡한 집이란 기대는 아예 접어두소. 손을 좀 많이 봐야 될 낍니다."
그날은 성 안에 있는 주점에서 하루를 묵기로 했다. 현령의 점고는 내일 아침에 받기로 했다. 북문 바로 옆에 객사(客舍)가 있었지만, 그들 차지는 될 수 없었다. 박 포교는 네 사람을 뒤에 세우고 앞장서 걸었다. 민가가 늘어선 골목을 지나자 제법 번뜻하게 지어진 기와집이 한 채 나왔다. `주(酒)`라 쓰인 깃발이 걸린 것으로 보아 이곳이 그들의 숙소인 듯했다.
서른 갸웃 되어 보이는 아낙이 앞치마를 두른 채 문 앞에서 걱정스런 표정으로 서성이다 박 포교를 보더니 함박웃음을 입에 달고 달려왔다.
"언제나 오나 했네. 어째 이리 늦었소?"
아낙이 박 포교의 팔을 툭 치면서 핀잔을 주었다.
"바쁠 거 뭐 있나? 별처럼 많은 게 시간인디. 남해 구경 시켜 주면서 왔지."
근심 없이 느긋한 박 포교와 달리 아낙은 고대 눈살을 찌푸렸다.
"조 포교 나리께서 여즉 기다리고 계시구마. 곧 벼락이 떨어질 판세요."
박 포교의 얼굴에도 바로 그늘이 드리웠다.
"이런 고약한……. 그 화상 빨리 여편네라도 하나 붙여줘야지. 기운이 남아도니 심술만 느는구먼. 뭐 좀 멕였는가?"
아낙이 한숨을 쉬며 대답했다.
"술상은 채리 드렸는디, 술기운이 도니 성화만 더 심해지요."
"알것소. 자 들어들 가입시다."
박 포교가 뒤를 돌아보며 손으로 재촉했다. 그러다 멀거니 아낙만 바라보는 일가가 눈에 들어오자 머쓱한 표정을 지으며 아낙을 인사시켰다.
"아, 여기는 내 안사람이라예. 댁들처럼 타지 사람이지예. 당신 고향이 어디랬지? 전라도 화순이랬나? 앞으로 어려운 일이 있으면 이 사람에게 말하시다. 재간이 많은 사람이니 도움이 될 낍니다."
자신을 옥진(玉珍)이라 소개한 아낙이 살가운 눈웃음을 지으며 윤점이의 손을 잡았다.
"어서들 오세요. 그 좋은 고향 버리고 남도 섬마을로 쫓겨 오셨으니, 마음이 얼마나 짠할까. 댁네들 오신다는 말을 들으니 남의 일 같질 않더라고요."
그예 윤점이는 눈물을 글썽였다. 오랜만에 나눠보는 인정이었다.
"고맙습니다. 잠시 신세 좀 지겠네요."
두 여인은 나이는 열 살 정도 터울이었지만, 워낙 고생바가지를 안고 산 윤점이가 모녀지간이라고 해도 될 만큼 늙어 보였다. 옥진이 윤점이를 보며 연신 혀를 끌끌 찼다.
주점 안으로 들자마자 작지만 실하고 다부진 체격의 조옹점이 눈을 부라리며 그들을 흘겨보았다. 손에 든 육모방망이가 까딱거리며 수틀리면 바로 한 방 내리칠 기세였다.
"어허. 박 포교. 죄수들 데리고 한양이라도 다녀오셨나? 저것들 기다리다 목이 다 빠졌네."
잡아먹을 듯 으르렁거리는 조 포교와는 달리 박 포교는 붙임성 좋게 살살 웃으면서 조옹집을 다독거렸다.
"이거 미안해서 우짜노. 조 포교가 기다린 줄 알았으모 날래게 왔을 낀데. 속 좀 푸소. 내 오늘 좋은 데 데리갈 낀께."
박 포교의 꼬임새에는 아랑 곳 않고 조옹집은 술 트림만 길게 쏟아냈다.
"참. 저것들은 오기도 전부터 말썽이더니 와서도 성가시기 짝이 없어. 오만방자하기가 하늘을 찌르는구먼. 너희들, 이런 수작을 부리고도 후환이 두렵지 않더냐? 오냐, 배짱은 가상하다만 그게 명줄 당기는 짓인 줄은 머지않아 알게 될 게다. 피똥을 싸고도 그 배짱 그대로면 내가 네 놈을 아비라 부르마."
조 포교의 육모방망이 끝이 차덕구의 코앞에서 춤을 추었다. 그 말에 박태수의 얼굴에도 찬 서리가 내려앉았다. 옥진은 소름이 돋은 얼굴로 박 포교 뒤에 몸을 숨겼다.
"어허! 조 포교 고만 허시게. 아직 이곳 물정을 몰라 그런 걸 역정을 낸다고 풀릴 일이 아니잖은가. 잘 타이르면 고분고분해질 긴께."
박 포교의 만류가 오히려 불을 지른 결과를 가져왔다.
"뭐여? 고분고분해져? 자네 저 새끼 눈깔을 보고도 그런 소리가 나오나? 잘 하면 한 대 치겠는걸. 저런 반골에게는 매 찜질이 약이란 걸 박 포교는 모르는가?"
조옹집의 화살이 차상두에게로 향했다. 아버지가 수모를 당하자 차상두의 두 눈에서는 호랑이도 태워버릴 횃불이 활활 타올랐다. 꽉 쥔 두 주먹으로 자갈이라도 부실 듯 힘줄이 불거졌다.
박 포교가 두 사람 사이를 끼어들며 조옹집의 옷깃을 잡아챘다.
"아부지가 봉변을 당하면 자식은 열불이 나는 게 당연지사 아닌가? 자자, 나가세. 내 기방으로 모시께. 화는 거기 가서 풀어."
못 이기듯 끌려 나가면서도 조옹집의 분은 풀리지 않았다.
"아냐. 네 저 놈을 걷어차기라도 해야 속이 풀리겠네. 비켜!"
똥똥한 몸집에 어디서 나왔는지, 조옹집이 날랜 몸짓으로 박 포교를 뿌리치고 차상두에게로 발길질을 차올렸다. 차상두는 발길질을 피하지 않았다. 명치를 제대로 맞은 차상두가 서너 바퀴 굴러 마당 끝에 나동그라졌다. 그러면서도 비명 한 마디 내지르지 않았다.
차홍이가 새파래진 얼굴로 오빠에게 달려갔다.
"오빠! 오빠! 괜찮아?"
차상두는 홍이의 손길을 뿌리쳤다. 그러면서도 고통 때문에 몸을 가누지 못하고 버둥거렸다. 홍이가 몸을 둘려 조옹집을 올려다보며 두 손을 모으고 애원했다.
"나리, 나리. 저희들이 잘못했어요. 제발 용서해 주세요."
두 손으로는 빌고 이마는 땅을 찧으면서 홍이는 온몸으로 용서를 빌었다.
한동안 홍이의 백배사죄를 분기에 떨며 노려보던 조옹집이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눈길을 거두고 박태수를 쳐다보았다.
"흠! 자, 그럼 가세. 오늘 한 번 코가 삐뚤어지게 마셔야 되겠네."
옥진에게 눈짓을 주면서 박태수가 조옹집을 강아지 몰듯 끌고나갔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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