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3장 충돌과 갈등 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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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3장 충돌과 갈등 ②
  • 남해타임즈
  • 승인 2019.09.23 17:47
  • 호수 66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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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종욱 작가

정자집이 완성되자 권문탁은 공부방을 성 안 관사에서 선소로 옮겼다. 한갓진 곳이니 돌아다닐 생각 말고 공부에만 전념하라며 아버지 권진태 현령은 세간을 모두 들여놓았다. 과거 공부에 필요한 서책들이 궤짝에 들려 날라졌고, 부족한 서책들은 향교 서고에서 빌려 가져왔다. 꼭 필요한 기물이 있으면 방자를 시켜 주문하게 했다.
근거리에 집이 있는 홍이가 권문탁의 뒤치다꺼리를 맡았다. 그 날 서로 우연찮게 대면한 두 사람은 워낙 신분의 차이가 나는지라 짐짓 모른 척했다. 홍이로서는 그 도령이 고을 원님의 자식인 줄 몰랐고, 권문탁도 걸레질에 열심인 계집아이가 한 집안이 떼로 유배 온 일가의 딸인 줄 몰랐다. 그러나 몇 마디 말이 오가자 서로의 처지는 분명해졌다.
행랑어멈까지는 아니더라도 권문탁이 정자집에서 지내려면 음식이며 이부자리를 살펴줄 사람이 필요했다. 곧 겨울이 닥칠 터이니 불을 지펴줄 이도 있어야 했다.
"지난번에 가보니 웬 동네 계집아이가 마루를 훔치고 있더군요. 유배 온 일가의 딸이라는데, 손길이 제법 야무져 보였습니다. 집도 가깝고 저도 편하니, 그 아이에게 일을 맡기시면 어떻겠습니까?"
잠시 미심쩍게 아들의 속내를 살피던 권진태는 시원하게 허락했다.
"유배 온 죄수의 딸이란 게 마음에 걸리긴 한다만, 한편 막일을 시켜도 말은 나지 않겠지. 네가 알아서 해라."
권문탁의 배려 덕분에 홍이는 일이 한결 수월해졌다. 시도 때도 없이 불려나가 갖은 굿은 일을 하느라 상채기가 끊이질 않더니, 이젠 집과 정자집을 오가기만 하면 되었다. 음식 장만에 필요한 양식이며 푸성귀, 어물, 육고기도 방자에게 부탁하면 제꺼덕 대령했다. 참기름이며 젓갈까지 현령은 정문탁이 필요하다면 뭐든 대주었다.
홍이의 딱한 사정을 아는 정문탁은 일부러 음식을 평소보다 많이 요구했다. 상을 들여오면 먹을 만큼만 덜어내고 나머지는 집에 가져가게 했다. 일가 모두의 배를 부르게 할 양은 아니어도 보리밥에 고추장에 비벼먹던 궁기는 덜어낼 수 있었다.
홍이가 권문탁의 수발을 들자 끼니 걱정만 던 게 아니었다. 현령 책방도령의 정자집에서 일하는 것도 뒷배가 되는지 아전들도 이들 일가에게 노역을 심하게 몰아붙이지 않았다. 차덕구에게는 한갓지거나 힘이 덜 드는 일을 맡기거나 아니면 명령서나 기별문을 각 부서로 전달하는 일을 맡겼다.
평소 눈썰미가 나쁘지 않은 차덕구인지라 꾀를 부리지 않고 소임에 충실했다. 어머니 윤점이 역시 나졸이나 관아 권속들의 끼니를 준비하고 배식하는 일이 할당되었다. 때로 봉천에 나가 군복을 빨거나 침선(針線)을 하는 일이 주어지기도 했다.

그러나 이런 과분한 처분은 근자의 일이었다. 남해에 발을 들이자마자 서로 견원지간(犬猿之間)이 된 포교 조옹집이 차상두를 가만 놔두지 않았다. 항상 눈 안에 두어 어떻게 하든지 괴롭혔고 성에 차지 않으면 매질도 서슴지 않았다. 차상두가 숨긴 응어리는 점점 깊어만 갔다.
유배 오고 두어 달이 지난, 대국산성의 헐거워진 성벽을 보수하는 일에 동원되었을 때였다. 달포 가까이 산성 아래 마을에서 숙식을 하며 노역을 했는데, 조옹집은 자기 관할이 아닌데도 자청해 도감(都監)을 맡았다. 차상두를 괴롭히려는 목적 하나 때문이었다. 차상두가 공들여 쌓아올린 성벽이 잘 매조지 되었는지 본답시고 장대를 밀어 넣어 무너뜨렸다.
그 때문에 차상두의 일은 두 배로 늘었고, 달이 뜨고 별이 반짝이는 밤에도 잔업을 해야 했다. 며칠이 지나자 기어이 차상두의 몸에 탈이 났다. 방 안에서 몸이 불덩이처럼 달아올라 끙끙대고 있는데, 조옹집이 들이닥치더니 개 몰 듯 내쫓았다.
"일을 야무지게 못하면 몸이라도 야무져야지. 어디서 꾀병이야!"
그렇게 비틀거리며 산성으로 올라가던 차상두는 요역장에 나타나지 않았다. 유배 온 죄인이 사라졌으니 관아는 벌집 쑤신 듯 야단이 났다. 사대부들이야 그렇지 않지만, 유배 온 평민이나 천민들은 가끔 유배지를 벗어나 달아나기도 했다. 노역의 고통을 견디지 못하거나, 관아의 심한 처우에 반발해서, 또는 돌아갈 기약 없는 유배살이에 자포자기해 야반도주를 감행했다. 그런 이들을 찾기란 쉽지 않았다.
깊은 산골에 들어가 화전민이 되기도 하고, 도적 떼의 일원이 되어 노략질을 일삼다가 잡혀 효수(梟首)되기도 했다. 달아난다 해도 숨어살기는 힘겨웠지만, 평민과 천민 유배인들의 도주는 이어져 관아의 골칫거리가 되었다. 이유야 어떻든 유배인이 종적을 감추면 책임 추궁이 뒤따랐다.
차상두처럼 일가가 유배를 왔다가 한 사람이 달아나는 경우는 드물었다. 남은 가족들에게 무거운 문책이 뒤따르기 때문에 아주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달아날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래서 처음 하루 정도는 관아에서도 대수롭지 않게 여겼다. 차상두의 평소 행실이 워낙 말썽을 도맡아 일으켰던지라 어디 골짜기에 처박혀 신세한탄이라도 하고 있으려니 여겼다.
그러나 이틀이 지나고 사흘이 되자 상황은 돌변했다. 즉시 포구마다 경계령이 내려졌고, 나졸들이 동원되어 수색할 차비를 갖추었다. 도주자가 체포될 경우 죄질에 따라 처벌 정도는 달랐지만, 유배지를 벗어났다면 필경 처형을 면하기 어려웠다. 다행히 차상두는 사흘째 되던 밤에 관아에 출두했다. 굶주림에 지쳐 집에 온 것을 아버지 차덕구가 끌고 온 것이었다.
차상두가 나타나자 불똥이 옮겨 붙은 쪽은 조옹집이었다. 자신이 노골적으로 학대를 한 사실은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었고, 노역에 지쳐 신열(身熱)이 나는 환자를 의원에게 보여 치료는 않고 막무가내 노역장으로 몰아냈으니, 사태를 야기한 장본인에 대한 징계를 피할 길이 없었다.
결국 이런 이해관계가 얽혀 차상두의 도주는 관내 지리에 어두워서 벌어진 이탈 정도에서 마감되었다. 제 발 저린 조옹집이 굳이 죄수를 감쌌고, 박태수의 두둔이 효과를 발휘한 덕택이었다. 이른 시간에 죄인이 돌아왔으니 현령도 재발에 대해 엄중히 경고하는 선에서 눈감아 주었다.
이런 사달이 있고난 뒤 조옹집의 괴롭힘은 다소 뜸해졌다. 차상두에게도 막나가는 반발은 없어졌다. 아버지와 어머니의 눈물 어린 간곡한 호소가 먹혀든 데다, 막상 달아나본들 사방이 바다인 섬에서 뛰어봤다 벼룩이요 독 안에 든 쥐라는 사실을 깨달은 탓도 있었다.
그러나 조옹집은 의외로 집요했다. 전처럼 대놓고 차상두 한 사람만 옭죄는 방식이 아니라 차덕구 일가 전체를 괴롭히는 쪽으로 마수를 넓혔다. 차상두를 행동거지를 감시한다는 허울 아래 차덕구 일가에 대한 제약이 몇 배로 늘어났다. 노역량을 은근슬쩍 늘렸고, 한밤중에 벌컥 문을 열고 들어와 일가를 밖으로 끄집어내 점검하는 행패를 부리기 일쑤였다.
가장 견디기 힘든 일은 홍이를 제 집으로 불러 부리는 엉큼한 짓거리였다. 마당 청소를 시키거나 텃밭에 난 잡초를 뽑으라는 잔심부름에서 시작하더니 조금씩 농도가 짙어졌다. 공연히 다가와 홍이의 몸을 힐끗거렸고, 어떤 때는 늦은 밤까지 붙잡아두고 돌려보내지 않았다.
홍이가 벌레라도 다가온 듯 질색을 했고, 어머니 윤점이가 차상두나 차덕구를 데리고 찾으러 왔기 때문에 조옹집도 조심하는 눈치였지만, 언제 무슨 일이 터질지 몰라 차덕구 일가는 전전긍긍했다. 만에 하나 겁탈이라도 당했다 한들 어디 가서 하소연할 길도 없었다.
결국 윤점이가 옥진을 만나 이런 사정을 털어놓았다.
"에그머니나. 그런 몹쓸 인간인 줄은 나도 몰랐어요. 아무리 죄수고 포교라지만 사사롭게 죄인을 부리면 법에 어긋나는데……"
옥진이도 치를 떨었지만, 말꼬리는 흐려질 수밖에 없었다. 관아에 호소해본들, 가재는 게 편이라 아전들이 죄수의 편을 들어줄 리 없었다. 더구나 조옹집은 민초들에게는 야박했지만 아전들과는 죽이 척척 맞는 사이였다. 그렇다고 박태수가 나서서 조옹집의 불법을 고발하기도 어려웠다. 박태수도 조옹집에게 약점을 잡힌 것이 없지 않거니와 동료끼리 척을 지면 만사가 불편해졌다.
한번은 박태수가 조용히 기방으로 조옹집을 불러냈다. 말로 타일러볼 생각이었다. 술이 몇 순배 돌아가자 옆에 앉혀둔 기생을 내보낸 뒤 슬쩍 본론을 꺼냈다.
"어이. 조 포교. 요즘은 차상두하고 잘 지내남? 차상두도 꼬리를 내린 듯하더만. 지도 벅시가 아닌 다음에야 기가 죽었것지."
이 한 마디에 조옹집은 술맛 떨어진다는 듯 문밖을 향해 가래침을 내뱉었다.
"믿을 게 못되는 놈이야. 얌전해졌다고 한들 한 철이지. 곧 본색을 드러낼 걸세. 자네도 조심해. 범 새끼는 아무리 잘 키워도 결국 주인을 물어뜯는 법이야."
박태수가 손사래를 치며 눙쳤다.
"설마 범 새낄까. 버릇 나쁜 굉이 한 마리 두고 너무 소동을 피우는 게지."
"그렇게 방심하다 큰 코 다치는 법일세. 만사불여튼튼이라구. 그런데 이 년은 술은 안 따르고 어딜 가서 안 와? 딴 손님 받으러 간 거야? 야!"
자리를 비운 기생이 얼씬도 않자 조옹집이 밖을 향해 고함을 질렀다.
"어허! 소피라도 보는 모양이지. 원래 계집이 측간 가면 시간이 걸리는 법 아닌가. 그렇게 계집이 아쉬우면 하나 들이지 그려. 자네야 재산이 부족한가, 권세가 없나, 사내구실을 못하나. 벗고 있으면 당나귀 새끼라고 불릴 양물(陽物)을 가진 위인이 자네 아닌가."
그 말에 귀가 솔깃해진 듯 조옹집이 은근히 박태수 쪽으로 몸을 붙이더니 목소리를 줄이며 말했다.
"흐흐. 내 양물이 남다르긴 하지. 기생년들 다 내 앞에서 녹아난다니까. 근데, 기왕 계집 들이라는 말이 나왔으니 말인데, 차덕구 딸내미 있잖아. 홍이. 고 계집을 안식구로 들였으면 싶은데, 어떻게 생각하는가? 한참 꽃필 열여덟 살이니, 시집도 갈 나이 아닌가? 요즘 계속 눈에 삼삼하게 떠오른단 말이야."
박태수는 자기 귀를 의심했다. 차덕구 일가를 괴롭힐 심산으로 추근거리는 줄 알았더니, 속에 엄청난 흑심을 품고 있었다. 박태수는 얼른 술을 들어 한 잔 쭉 삼켰다.
조옹집. 이 작자는 한번 한다면 뿌리를 뽑고야 마는 잡놈이 아니던가!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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