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장 살아가는 의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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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4장 살아가는 의미 1
  • 남해타임즈
  • 승인 2019.09.27 16:34
  • 호수 6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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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임종욱

권문탁이 과거 응시를 위해 문적을 쌓아둔 정자집에도 가을 물이 깊이 들었다. 넓진 않아도 산들 사이로 한 자락 두 자락 깔린 논에서는 한창 가을걷이를 독려하는 매구 소리가 울려 퍼졌다. 꽹과리 소리가 아득하게 들려왔다. 태평소 울림이 경쾌해 절로 어깨춤이 나왔다. 정자집 낙성을 지신(地神)에게 알릴 때 왔던 그 매구패인 듯싶었다.
창호 문을 활짝 열면 강진만이 한 눈에 드러나는 방 안에서 권문탁은 주자(朱子)가 풀이해놓은 경서의 집주(集註)를 들척이며 학업에 몰두했다. 다음 식년시(式年試)는 계유년(癸酉年)에 있으니, 내후년 금상 13년(1813)에 있을 터였다.
권문탁은 아직 초시도 치르지 않았다. 관직에 별 뜻이 없었던 그는 아버지의 성화에도 불구하고 부과(赴科)를 차일피일 미루었다. 그러나 기왕 급제를 목표로 삼은 이상 게으름을 부릴 짬은 없었다. 식년시는 12지(支) 가운데 자(子)와 묘(卯), 오(午), 유(酉)가 드는 해에 치르는 정기 시험이었다. 대개 1월에서 5월 사이 한양 도성에서 치러졌다.
예비시험이라 할 초시는 식년 전해 8월 15일 이후에 실시했다. 농번기 등이 겹치는 것을 피하기 위한 배려였다. 그러니 초시까지는 채 1년도 남지 않은 셈이었다. 과거만을 위한 차비는 늦었지만, 초시 낙방을 걱정할 만큼 공부에 자신이 없진 않았다.
가는 초필(抄筆)을 들어 새겨두어야 할 구절을 백지에 옮겨 적는데 홍이가 밖에서 기척을 냈다.
"나리. 상 들여가옵니다."
막 오시를 지난 때라 낮 끼니를 들 시간은 아니었다. 권문탁은 평소 아침을 먹지 않았다. 새벽에 일어나 공복으로 있을 때 글이 머리에 쏙쏙 들어오는 버릇을 해서 식사는 느지막이 먹겠다고 처음부터 다짐해 두었다. 번거로우니 하지 말라고 해도 홍이는 항상 책상 곁에 다과상을 차려 약식이며 한과, 그리고 따뜻한 매실차를 건사해 두었다. 평소 군것질은 좋아하지 않는데도 글을 읽다 보면 어느새 손이 다과상을 더듬고 있었다.
"그래? 들여 오거라."
문을 연 홍이가 조심스런 몸짓으로 상을 들고 들어왔다. 입성은 누추했지만 언제나 말끔하게 씻고 다린 옷을 입은 홍이였다. 그러나 아침저녁으로 제법 서늘한 기운이 도는 날씨에 견주면 어딘가 부실한 옷매무새였다. 아무리 남쪽 지방이라지만 여기 겨울도 춥기는 추울 것이었다. 권문탁은 갑자기 자신이 입고 있는 비단옷이 거추장스럽게 느껴졌다.
오늘따라 상에 오른 음식이 제법 풍성했다. 밥과 국이야 늘상 오르는 것이지만, 산적(散炙)이 먹음직했고 지짐이와 고등어구이가 입맛을 돋우겠다는 듯 코끝을 설레게 했다.
수저를 들어 몇 술을 뜬 뒤에야 나가는 홍이였다. 다소곳이 앉아 방바닥으로 눈길을 내린 홍이를 보며 권문탁이 말을 건넸다.
"허! 혼자 먹기에 과분한 성찬이구나. 너는 먹었느냐?"
"쇤네는 진즉에 먹었사옵니다. 어서 드시옵소서."
마치 몸종이 주인을 대하는 듯한 홍이의 언동이 권문탁은 못마땅했다. 고을 원님의 귀한 아드님이니 작은 흠이라도 잡힐까 언제나 안절부절못했다. 벌써 한 집에서 대면을 한 지도 한 달여가 지났다. 이젠 내남없이 편안해질 만도 하련만 늘 적당한 거리감을 두고 움직였다. 아무래도 만난 첫날 홍이를 놀라게 한 것이 마음에 새겨진 모양이었다.
"이 음식은 네가 장만한 것이더냐?"
짐짓 다정스레 묻는다고 입을 열었는데, 권문탁 자신이 들어도 버석거렸다. 무뚝뚝해 마치 서툰 솜씨를 나무라는 듯 들릴 것 같았다. 홍이가 잠시 망설이더니 어렵게 입을 열었다.
"아닙니다. 성 안에 계시는 옥진 아씨께서 보낸 것이옵니다."
"옥진 아씨? 아! 박 포교 안사람 말이구나. 전라도가 고향이라지? 어쩐지 열무김치 맛이 색다르더라. 아삭아삭 씹히는 풍미가 막 담근 듯한걸."

가끔 성 안을 들어갈 때면 동문을 통해 동헌으로 갔다. 한번은 박태수 포교가 객점 앞에서 웬 아낙네와 말을 주고받는 것을 보았다. 먼저 그를 알아본 아낙이 `에그머니나!` 하면서 고개를 조아렸다. 그래서 옥진이 박 포교의 안사람인 것을 알았다.
홍이가 뺨에 홍조를 띠면서 고개를 들어 권문탁을 빤히 쳐다보더니 살짝 토라진 목소리로 대꾸했다.
"아니옵니다. 열무김치는 제가 담근 것이어요. 요 앞에 묵정밭이 있기에 그냥 두기 아까워 푸성귀를 심었답니다."
권문탁이 저도 모르게 제 머리를 탁 쳤다. 박 포교 안사람 칭찬을 하려다 엉뚱한 공치사를 늘어놓은 셈이었다.
"어이쿠. 송구하구나. 가까이 있는 사람의 손맛도 모르다니, 내가 이렇게 미련하단다."
"아닙니다. 옥진 아씨 솜씨에 비기면 쇤네는 한 걸음도 못 가옵니다."
홍이가 권문탁의 시늉을 보더니 입가에 웃음을 담으며 살짝 손사래를 쳤다.
"과공비례(過恭非禮)라 했다. 한 달도 넘게 네가 만든 음식을 먹었는데, 네 솜씨를 내가 모르겠니. 음식 맛은 정성 맛이라 했다만, 네 모친께서 야무지게 가르치신 게 분명해."
"과찬이십니다."
"어허! 무슨 소리. 내가 별 재주는 없다만 거짓말은 못한단다."
그렇게 말을 주고받는 사이 밥 한 공기가 비워졌다. 옆에 여벌로 한 공기가 더 있었지만, 상을 물렸다. 얼른 내가려는 것을 손짓으로 막으며 권문탁이 말했다.
"오늘은 내가 네 음식 솜씨를 몰라봤으니, 벌충으로 바깥바람이나 쐬잖구나."
홍이가 상을 든 채 어리둥절하며 고개를 돌렸다.
"바깥바람이요?"
"그래. 네가 나보다 여기 온 지는 오래됐다만, 남해의 명승지를 찾을 짬이 어디 있었겠니? 이 동네 어르신께 여쭤보니 저기 망운산 기슭에 오동뱅이라는 데가 있다더라. 제법 골짜기가 길고 물도 맑다 하니, 오늘은 같이 거기나 가볼까 싶다. 차비할 것도 없으니 상만 치우고 나오너라. 나도 덕분에 어지러운 머리나 좀 식혀야지."
홍이가 뭔가 말을 꺼내려 우물쭈물하더니 그냥 삼키고 밖으로 나갔다.
동네 노인에게 들었다 했지만, 사실은 어떤 이의 문집을 보고 안 것이었다. 향교 서고를 뒤지다 우연히 겸재(謙齋) 박성원(朴聖源, 1697~1767)이 쓴 남행록(南行錄)이란 시집이 눈에 들어왔다. 뭔가 싶어 들춰보니 겸재가 영묘(英廟, 영조) 갑자년(甲子年, 1944년) 남해로 유배를 와 두어 해 살았는데, 그때 견문을 시로 남긴 책이었다.
거기에 이런 시가 있었다.

<이십오일 망운산 아래 오동뱅이에 산수 자연이 아름다운 곳이 있다. 어제 여러 사람들이 함께 노닐자고 하기에 허락하고, 돌아와 각자 지은 시를 내놓았다. 그래서 김경휘의 시에 차운하노라(二十五日 望雲山下梧桐坊 有泉石之勝 昨日諸君請往遊許之 歸來各進所賦 遂次金君鏡徽韻)>
남쪽 고을 아름다운 곳으로 오동 마을을 말하는데
잠시 어린아이 예닐곱과 함께 노닐길 허락했지.
골짜기 사이 개울물소리는 발걸음 밖으로 이어지고
망운산의 산 빛은 홀로 그 가운데서 보노라.
주머니에는 주변 사물을 읊은 시들을 모아 담았고
가벼운 소매 깃에는 몸을 씻은 뒷바람을 담아왔네.
눈앞이 신선 고장인데 나는 외려 못 갔더니
봄 한 철의 소식을 네가 능히 통하는구나.
南州佳境說梧桐 暫許冠童六七同.
穿壑溪聲聯步外 望雲山色獨看中.
奚囊拾得吟邊物 輕袂携來浴後風.
咫尺仙源猶阻我 一春消息爾能通.

읍성을 빙 돌아 북문을 지나니 봉강산(鳳降山)이 손에 잡힐 듯 다가왔다. 산 북편 모롱이를 왼편으로 끼고 쉬엄쉬엄 걸었다. 꼭 오동뱅이까지 갈 마음은 아니었지만, 말을 꺼냈으니 어름까지라도 가야 했다. 내심 겸재가 그다지도 칭송한 절경을 눈으로 만나보고 싶기도 했다.
도령복을 벗고 평복을 입었더니 알아보는 이가 없었다. 늦가을 햇살은 제법 따가웠고, 바람은 얼추 시원했다. 미투리가 다소 헐거웠지만, 걷기에는 가죽신보다 한결 수월했다. 홍이는 권문탁과 보조를 맞추지 못하고 저만치 떨어져 엉거주춤 따라왔다. 너무 멀어졌다 싶으면 올 때까지 기다렸다.
"내 곁에 서서 따라오려무나. 그러다 산 도적이라도 나타나 업어 가면 내가 구하지도 못하겠다. 명색이 사내가 되어 계집 하나 간수 못했다면 어디 얼굴이나 들고 다니겠느냐. 하하하!"
홍이는 귀까지 빨개져 좌우를 두리번거리다 핀잔을 주었다.
"사내 계집이라뇨. 누가 들으면 쇤네는 벼락을 맞습니다."
권문탁이 홍이의 어깨를 툭 치며 내숭을 떨었다.
"그럼 사내 계집이지. 나이로 쳐도 나와 나는 오누이 터울이 아니더냐. 한 집에서 늘 보는 사인데, 그리 내외할 게 있느냐."
홍이가 그 서슬에 화들짝 놀라 저만치 달아났다.
황망한 꼴을 본 권문탁이 껄껄 웃으며 다시 길을 앞장섰다.
과연 오동뱅이는 명불허전(名不虛傳)이었다. 강진만으로 흐르는 갯물의 수량이 점점 많아지더니 골짜기가 성큼 다가왔다. 물소리가 우레는 아니어도 상쾌한 소리가 가을 나뭇잎들을 반짝반짝 물들였다.
골짜기를 휘돌아 감기는 곳에 이르니 물살이 제법 세차게 흘렀다. 너럭바위는 없어도 제법 풍치를 돋우는 바위들이 바다로 재촉하는 물줄기를 붙잡아 머물게 했다. 미투리를 풀고 버선도 벗어던진 채 고인 물에 맨발을 담았다. 짜릿한 냉기에 머리카락이 쭈뼛 돋았다.
"우와! 엄청나게 시원해. 한여름이라면 등골까지 오싹하겠어."
권문탁이 바지를 접고 버선까지 벗어젖히자 홍이는 놀라 아예 열 걸음은 뒤로 내뺐다.
"망측하옵니다. 어서……"
홍이는 등을 돌린 채 말끝을 미처 잇지 못하고 웅얼거렸다. 계곡을 올라온 권문탁이 홍이의 등을 보며 말했다.
"내년 여름에 우리 다시 와 보자꾸나. 이곳엔 더위가 비빌 틈도 없겠어."
이렇게 말하면서도 권문탁은 내년 여름에도 자신이 이곳에 있을지 갈피를 잡을 수 없었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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