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장 놀이하는 사람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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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6장 놀이하는 사람들2
  • 남해타임즈
  • 승인 2019.11.08 15:12
  • 호수 6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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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임종욱

"오빠 지금 뭐하는 거야?"
정자집 도령님의 저녁을 봐 주고 잠시 집에 들렀더니 차상두가 바깥으로 나갈 차비를 하고 있었다. 일 다 끝나고 날도 어둑해졌는데, 외출은 홍이가 보기에 그리 좋은 징조가 아니었다. 잠잠하던 방랑벽이 또 도졌는가 싶었다. 낮에 도령님이 부엌에 들어와 넌지시 건넨 언질도 찜찜했다.
"너희 오빠가 차상두지? 잘 지내나?"
도령님의 입에서 아버지와 어머니 말은 나왔어도 오빠 이름이 오르기는 처음이었다. 어쨌거나 상전 입에서 식구 이름이 나오다니 그리 반가운 일은 아니었다.
"그러하온대……?"
홍이의 얼굴이 굳어지자 정문탁이 얼른 표정을 바꾸면서 말문을 닫았다. 불길했다.
"오라버니가 또 무슨……?"
사고를 쳤느냐는 말이 차마 입에서 떨어지지 않았다. 정문탁이 급히 손을 휘저으며 얼버무렸다.
"아니다. 아니다. 나하고 나이도 비슷하고 해서 물어본 거야. 가끔 나뭇짐을 지고 오는 기척도 있던데 모른 척할 수만은 없지 않느냐?"
박태수 포교 나리가 얼마 전 다녀와 부모님과 몰래 쑥덕거리는 것도 보았다. 목소리가 워낙 낮아 내용은 알 수 없었지만, 이후 아버지의 한숨소리가 잦아졌었다. 뭔가 말썽을 피운 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 소식이 도령님에게도 전해진 모양이었다.
홍이의 어깨가 축 처지자 도령님은 엉뚱한 소리만 늘어놓더니 낭패한 표정으로 황망하게 부엌을 나가버렸다.
그래서 유심히 오빠의 동태를 살피는데, 오늘 딱 걸린 것이었다.
홍이의 썩는 속내는 아랑곳없이 오빠의 입가에서는 웃음이 떠나지 않았다.
"아! 홍이구나. 어디 좀 다녀올 데가 있어. 밥은 거기 가서 먹을 테니까 아버지 어머니나 잘 챙겨드려."
차상두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바닷가 쪽으로 달려갔다. 어둠 속에서 멀어지는 오빠를 바라보며 홍이는 고개를 홰홰 저었다.

매구 연습이 매일 있지는 않았다.
가을걷이는 애저녁에 끝났다. 경기도라면 농한기가 시작되어 새끼를 꼬거나 부역에 나가는 일 말고는 한적해지지만, 남해는 겨울에도 날씨가 푸근해 밭농사가 이어졌다. 논을 갈아엎고 마늘을 심거나 시금치 씨를 뿌려 겨우내 키웠다. 시금치보다는 마늘을 많이 심는 까닭은, 손이 많이 가기는 해도 매운 식물이라 저장을 오래할 수 있어 때로 요긴하게 쓰일 수 있기 때문이었다.
그런 탓에 낮에 마늘 농사로 지친 사람들이 따로 이어마을 대나무 움막까지 와 매구를 하다 돌아가기가 쉽지 않았다.
구자효 상쇠 어른의 말을 들어보면 남해에는 마을마다 매구패가 있다고 했다. 다들 어릴 때부터 할아버지, 아버지가 농번기 때 나가 매구 노는 것을 보고 눈대중으로 배워 능란하지는 않아도 매구 놀기에는 부족하지 않은 실력을 갖췄다고 했다.
"매구 놀음이 돋보일 때는 역시 집들이 굿놀음을 할 때여. 남해가 영 변방이라 호구가 그리 많진 않고 궁기에 찌들어 살지만, 제법 노비도 거느리고 땅 마지기도 가진 부자가 아주 없지는 않채. 또 반가(班家)도 더러 있고. 그런 집에서 자식이 떨어져나가 새로 호구를 차리면 번듯하게 집을 져준단 말이거든. 그리 기와집이 올라갈라 치면 우리 매구패로 부린단 말이제.
집안에선 큰 경사니 동네 서툰 매구패보다 우리처럼 동리마다 잘 노는 이들만 모인 매구패가 제격이여. 잡색(雜色)들이야 동리 사람들이 삼삼오오 모여 도와도 그만이지만, 매구라면 우릴 따라올 치들이 하동이나 사천 가도 만나기 어렵잖고 말고."
구자효 상쇠 어른의 기나긴 매구 자랑 사설이 다 귀에 쏙쏙 들어올 만큼 차상두의 머리가 돌아가지는 않았다. 그래도 구수한 입담으로 들려주는 매구패의 이력은 들을수록 재미났다.
차상두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북을 제대로 잡아봤다. 포천에 살 때도 친구들과 모여 놀거나 동네잔치가 있으면 얻어먹은 술기운에 북채를 잡아 두둥 두드려보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그것은 마구잡이 북놀음이었을 뿐이었다.
차상두에게 북 치는 법을 맡아 가르쳐주는 유순심은 시집 못 간 노처녀였다. 얼굴도 예쁘장하고 일솜씨도 야무진데다 싹싹하기도 해서 사내들의 애간장을 녹일 만했지만, 병든 아버지의 병구완을 도맡았고 역병으로 세상을 떠난 어머니를 대신해 어린 동생들까지 돌봐야 했다. 당연히 집안 형편이 좋을 리 없었다.
이웃 마을에서 뚜쟁이가 와 중신을 놓은 적도 여러 차례였지만, 차마 병든 아버지와 어린 동생을 나 몰라라 할 수 없어 한 해 두 해 미루다 보니 어느 새 서른을 코앞에 두고 있었다. 같이 자란 동무들은 진즉에 성혼(成婚)해서 애들을 주렁주렁 달고 다니는데, 그녀에게는 논밭이 시댁이었고, 매구가 자식이었다.
유순심은 어릴 때부터 매구 기물을 가지고 놀기를 좋아했다. 좋아하기만 한 것이 아니라 소질도 만만치 않아 기물을 쥐어주면 눈동냥만 하고도 곧잘 따라했다. 그 재미에 동네 어른들이 계집애라 내쫓지 않고 소일거리 삼아 차근차근 가르쳤더니, 지금은 남해 바닥에서 그녀를 따라잡을 사람이 없을 지경이 되었다.
"그렇게 치면 안 되여. 북은 가생이를 치면 소리가 짱짱하지 않아여. 요렇게 북채를 단단히 쥐고 북 얼굴과 나란히 두면시롱 한복판을 내리쳐야 옹골진 소리가 나여."
차상두도 몸치는 아니어서 가르쳐주는 대로 금방 요령을 익혔다. 큰누나 같은 유순심이 가르치는 보람을 느끼도록 혼자 애쓰며 있는 힘껏 북을 내리치는데, 칭찬보다는 핀잔을 듣기 일쑤였다.
"힘으로 북 칠라카믄 소한테 맡기제 사람한테 맡기것노. 북을 치라 켓제 누가 북 뚫으라 켓나."
진땀을 뻘뻘 흘리면서 북채를 두드리는 차상두를 보면서 유순심은 혀를 끌끌 찼다. 그렇게 꾸지람을 소쿠리째로 먹었지만, 그런대로 매구의 북 타법은 몸에 배어졌다.
진짜 곤란하기는 상모 돌리기였다. 남들이 돌리는 것 볼 때는 저것쯤이야 싶었는데, 막상 상모를 쓸고 돌리자니 마음대로 따라주질 않았다. 무릎에 탄력을 주면 자연스럽게 돌아간다는데, 말처럼 수월하지 않았다. 목으로 돌리면 목이 뻣뻣하게 굳어졌고, 허리로 돌리자니 허리 따로 상모 따로 놀았다.
유순심은 엉덩이를 좌우로 씰룩씰룩 흔들고 무릎을 까딱이면서 잘도 돌리는데, 차상구의 몸은 점점 돌부처가 되어갔다. 대놓고 말은 않지만 유순심도 답답한 속내를 숨기지 못했다.
허나 고집과 끈기라면 차상두도 남 못지않았다. 상모를 집에까지 가져와 남들 잘 때 혼자 언덕에 올라 달빛을 벗 삼아 기량을 갈고 닦았다. 그랬더니 어느 순간부터 귀신이라도 씐 것처럼 상모가 마음먹은 대로 돌기 시작했다.
"우리 상두 재주를 타고난 모양이래이."
그제야 유순심도 흡족하게 탄성을 터뜨렸다.
무명천을 감아 끈을 만들어 북에 감고 목과 어깨에 돌려 밀착시킨 뒤 매구패의 놀이마당에 들어가게 된 것은 처음 발을 들여놓은 지 한 달여가 지났을 때였다. 북장단을 맞추고 상모를 돌리면서 진굿 마당을 순서대로 따라잡는 일은 힘은 들어도 이상하리만큼 신바람이 솟구쳐 올랐다.
"우리 매구패 굿놀음 과장을 `진(陣)굿`이라 부리는 것도 다 까닭이 있제이. 우리 남해 매구는 원래 저기 망운산 화방사(花芳寺)에서 놀던 `중매구패`에서 나왔다 아이가. 더 연원을 따라가믄, 남해가 변방이라 왜구의 침입이 잦아 예전에는 전란도 빈번했다 카데. 그랑께 방비로 위한 훈련이 잦았고, 군사들의 사기로 올려주기 위해 매구가 동원된 것이 지금 같은 과장이 된 거여. 진법(陣法)을 본받았다케서 `진굿`이라 부르는 거 아닌감."
구자효 상쇠 어른의 매구에 얽힌 사설은 밤을 새워도 모자랄 판이었다. 듣기에 지친 차상두가 꾸벅꾸벅 졸아도 눈치 채지 못하고 입담을 이어갔다.
어울림굿, 거듭나기 길굿, 삼채굿, 덕배기굿, 호우굿, 따드래기긋 등등등 배울 것도 많았다. 각 마당마다 나오는 장단이며 발동작, 차례 따위를 간신히 머리에 담아 집에 오자마자 백지를 꺼내놓고 옮겨 적었다. 붓을 놀려 그림을 그리고 짧은 언문 실력으로 방법을 적어 나가며 외우고자 진저리를 쳤다.
"상두가 뒤늦게 학문 바람이 불었네. 절차탁마(切磋琢磨)가 양반 댁에만 있는 줄 알았더니 우리 집 아랫목에도 있었구나. 이러다 우리 집안에서 대과 급제자 나오겠다."
차덕구가 이 꼴을 보고 어처구니없다는 듯이 한 마디 하고는 다시 이불을 뒤집어썼다. 그러거나 말거나 차상두의 매구 삼매경은 나날이 깊어만 갔다.
어느 날 대나무 움막에 갔더니 분위기가 여느 때와 조금 달랐다.
한 차례 매구판을 돈 다음 구자효 상쇠 어른이 매구패들을 불러 모았다. 새벽에 잡아왔다는 감싱이가 회가 되어 올라왔고, 탁배기까지 몇 통 움막 안에 진을 치고 있었다. 매구패들은 눈이 휘둥그레져 초를 넣어 버무린 고추장에 싱싱한 회를 푹 찍어 입에 넣기에 바빴다. 얼큰한 매운탕 끓는 냄새까지 대나무 울짱 안을 떠돌았다.
탁배기 한 사발을 시원하게 들이키고 오징어가 들어간 묵은지 지짐이를 간장에 찍어 우걱우걱 씹던 방자가 양 볼을 씰룩이면서 물었다.
"상쇠 어른요. 오늘이 누구 귀 빠진 날인감요? 웬 진수성찬이요?"
구자효 상쇠가 자못 긴장한 표정을 지으며 입을 열었다.
"선원마을에 사시는 정판서 어른 알제? 한양서 지내다 올봄에 낙향하신 분 있잖은가?"
"야. 만석지기라던 그 어르신 말이지예."
"그려. 그간 짓던 별서(別墅)가 조만간 마무리될 모양이야. 말이 별서지 아흔아홉 칸에서 세 칸이 모자란다나, 네 칸이 모자란다나, 좌우간 어마어마한 대공사가 막바지에 이르렀다네. 오늘 낮에 그 집 청지기가 오더니 집들이굿놀음을 크게 한 판 벌여달라는 거야. 비용이라면 걱정을 말라더군. 자네들이 먹는 술이며 회가 다 그 댁에서 온 기네. 돼지도 한 마리 보내겠다쿠네."
"그라몬 입이 째져라 기뻐할 일이제, 어째 근심 짊어진 사람 꼴이라요?"
"아, 우리 매구판만 부른 게 아니니까 그렇제. 저기 전라도 땅에서 내노라하는 농악대도 부른다는 게여. 이러면 놀음이 아니잖은가, 실력 싸움이제. 그라니 내가 지금 술이 넘어가기생겼나?"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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