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져진 것이 돌만은 아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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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져진 것이 돌만은 아니니
  • 남해타임즈
  • 승인 2019.12.06 12:42
  • 호수 6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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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땅의 끝에서, 하늘의 시작에서

금산은 두 개의 얼굴을 가졌다. 아득히 바다가 펼쳐져 있는 상주 쪽에서 보면, 금산은 영락없는 돌산이었다. 해수면을 박차고 치오르는 금산은 잠깐 땅과 숲을 보이지만 바로 숲을 헤치면서 바위들이 삐죽삐죽 얼굴을 드러냈다. 그리고 산허리부터는 온통 바위로 뒤덮여갔다. 거인이 가슴을 열어둔 듯 하얀 갈빗대가 숭숭 드러난 금산이 제 알몸을 자랑했다.

수백 가지 다른 형상으로 솟구치는 바위는 그 얼굴에 맞는 이름도 가졌다. 일월봉이 있는가 하면 대장암(장군바위)도 있고, 좌선대, 상사바위 등 사람들은 제 상상대로 바위에 어울리는 이름을 붙여주었다. 언제부턴가 이들 바위들은 한 가족이 되어 금산 38경(景)으로 불렸다.

그런가 하면 섬의 안쪽에서 바라보는 금산은 언제 돌을 둘렀냐는 듯 흙산으로 표변한다. 완만한 구릉과 언덕을 펼치면서 하늘 길을 여는 후면은 금산의 척추가 되어 미끈하면서도 아기자기한 초록빛 비단 산[錦山]의 등이 되었다.
상주에서 금산을 오를 때 사람의 마음은 들떠오를 수밖에 없다. 가파른데다 바위의 요지경이 눈을 어지럽혀 시선을 한 곳에만 둘 수 없기 때문이다. 기암괴석(奇巖怪石)에 한눈을 팔다 넘어질까 엎어질까 저어하면서도 산행하는 사람들의 눈동자는 잠시도 가만히 있지 못한다.

그러다 산을 넘어 하산하는 길을 더듬노라면, 마치 거짓말처럼 어깨 너머로 보였던 푸른 바다는 감쪽같이 사라진다. 대신 깊고 그윽한 심산유곡(深山幽谷)에 들어와 초록의 비단에 감싸여 걷는 착각에 빠진다. 그리하여 들떴던 흥분은 가라앉고 땀도 식고, 무념무상의 세계를 더듬는 수도승의 마음자리가 차분히 자리한다. 오르면서 보았던 금산과 내려가면서 보는 금산은 이렇게 사람의 마음을 둘이면서 하나로 이어놓는다.

홍이와 권문탁은 처음으로 금산에 올랐다. 정자집이 있는 선소에서는 금산이 잘 보이지 않았다. 강진만으로 내려가 눈길을 멀리 주어도 금산은 그저 아슴푸레 이어지는 산의 능선 일부로밖에 보이질 않았다. 그 영험한 해수관음보살께서 머물며 자비의 손길로 중생을 고해(苦海)의 바다에서 건진다지만, 선소에서는 그저 꿈 속 이야기처럼 느껴질 뿐이었다.

이따금 두 사람은 정자집 창문을 열고 구운 감자의 껍질을 벗겨 호호 먹으면서 금산의 위치를 가늠하곤 했다. 구름 낀 흐린 날에는 아예 바다 너머가 하얀 무명천으로 덮였다. 해 맑은 화창한 날이라도 손가락 가리키는 곳이 모두 금산인 듯했다.

"홍이야. 너 알고 있니? 저기 보리암에 머물러 계시는 관음보살께서는 기도하는 사람의 소원 한 가지는 꼭 들어주신다더구나."

<다음호에 계속>권문탁이 재미있다는 듯 말을 꺼냈다.

낯선 바다 마을로 끌려와 만단의 고생길을 걷고 있는 부모님과 오빠를 떠올리며 홍이가 물었다.

"왜 딱 한 가지뿐일까요?"

가볍게 던진 말에 홍이가 간절하게 반응하자 권문탁은 잠깐 머쓱해졌다.
"그러게나 말이다. 사람 소원이 한 가지만은 아닐 터인데……, 부처님이 좀 인색하신 건가?"

그러면서 권문탁은 멀리 금산으로 눈길을 주며 당장 머릿속에 떠오르는 소원을 헤아렸다. 홍이와 가시버시가 되어 금산 한 자락에 밭을 일구고 귀여운 자식들 낳으면서 평생 오순도순 살고 싶기도 했다. 아니, 내후년 과거에 장원급제해서 떳떳하게 홍이를 아내로 맞아 살아도 좋을 듯했다. 이도저도 아니면 홍이처럼 평민이 되게 해달라고 빌어야 할까? 어느 것 하나 현실과 멀찍이 떨어져 있어 웃음이 나왔다.

"왜 웃으세요?"

홍이가 입가에 묻은 감자 조각을 손등으로 훔치면서 물었다. 동그랗게 떠진 눈이 당장 핥고 싶도록 귀여웠다.

"아니다. 소원을 하나밖에 들어주지 않는 건, 욕심을 부리면 복도 화가 된다는 가르침을 주시기 위해서가 아닐까 해서 말이야. 하나를 가지면 둘로 늘리고 싶고, 그렇게 열 개 백 개 만 개, 사람의 욕심은 한이 없잖니. 그러다 결국 욕심의 바다에 빠져 죽겠지. 그래서 소원을 소중히 여겨 잘 골라 하나만으로 만족하라고 딱 하나뿐이 아닐까 싶어."

잠시 생각해보던 홍이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더니 엉큼하게 눈을 흘기면서 홍이가 물었다.

"그럼 도련님, 그 딱 하나뿐인 도련님의 소원은 뭘까요?"

"아 있지. 하지만 소원은 말하면 효험도 사라진다니 말하지 않겠다. 너는 뭔데?"

"말하면 안 된다면서요?"

새치름해지는 홍이를 보며 권문탁이 장난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런가? 말로 하면 안 되지만, 마음으로 나누면 상관없다더구나. 우리 마음으로 소원을 나눠볼까?"

"어떻게 마음으로 소원을 나누나요? 글로 쓰면 모를까."

그러면서 홍이는 자신이 글을 쓰지 못한다는 걸 아프게 깨달았다. 도련님은 문장에 능해 대과에 장원급제도 큰 일이 아닌데, 자신은 언문조차 읽지 못했다. 문득 하늘이 더욱 높아지는 기분이 들었다.

이런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권문탁은 넉살좋게 말을 이었다.

"어찌 글만 있겠느냐. 바로 단박에 통하는 방법이 있단다."

홍이가 호기심에 가득 차 물었다.

"그게 뭘까요?"

"아주 쉬운데, 우리 한 번 해볼까?"

홍이가 옷깃을 여미며 물었다.

"같이 해야 하나요?"

"그럼. 혼자 하면 정말 재미없지."

홍이가 대나무 숲 쪽을 훔쳐보며 또 물었다.

"쉬운 건가요? 쇤네는 아는 게 없어서."

"쇤네라 하지 말고 `나`라고 하라니깐! 자, 이리 가까이 와 봐라. 내가 알려주마."

말만 그렇게 할 뿐 권문탁이 홍이에게 다가가자 기겁하듯 홍이가 몸을 뒤로 물렸다.

"누가 봅니다."

"보라지 뭐. 그렇게 떨어져서야 어찌 소원을 나누겠니."

"마음이면 되지 않나요?"

권문탁이 재빨리 홍이의 허리를 낚아채며 말했다.

"이렇게 몸을 안으면서 입술을 맞추면 우리 머릿속에 있는 소원이 눈에 훤히 들어온단다."

권문탁의 팔이 어느새 홍이의 등을 타고 올라가 어깨를 완강하게 움켜잡았다. 대거리할 틈도 없이 권문탁의 입술이 홍이의 입술을 휘감았다. 달콤한 침이 서로의 목구멍을 타고 넘어갔다.

마루에 눕혀진 홍이가 버둥거렸지만, 남자는 그녀를 놓아주지 않았다. 홍이는 자신도 모르게 힘이 빠져 부둥킨 손을 놓아버렸다. 서로 포개진 두 사람의 실랑이를 늦가을의 햇살이 나무 그림자로 가려버렸다.

그리고 지금 두 사람은 말로 떠올리던 금산에 와 있었다. 오늘 온 것은 아니었다. 어제부터 와 있었다.

방자를 시켜 나귀 한 마리를 수소문해오라더니 내쫓듯 방자를 돌려보냈다. 한 며칠 출타할 테니 오지도 말고, 남에게 말하지도 말라며 동전 몇 닢을 쥐어주었다.

손 안에서 출렁이는 동전 소리를 벗 삼아 방자는 염화시중(拈花示衆)의 미소를 홍이에게 던지며 대나무 숲을 돌아내려갔다. 눈길을 피하면서 홍이는 못 들은 척 마루를 훔쳤다.

다음 날 아침 언제 기별을 했는지 옥진의 주점에서 바구니에 찬거리를 담아 보내왔다. 편한 외출 차림으로 옷을 갈아입은 권문탁은 나귀 등에, 홍이는 싣고 바구니는 얹고 길을 떠났다. 아침 햇볕은 봄날처럼 온화했다.

해가 납산의 막바지에 걸릴 즈음 두 사람은 금산 보리암에 닿았다. 주지스님을 어떻게 구워삶았는지 암자에서는 선뜻 후미진 방 하나를 내주었다. 법당에서 조금 떨어진 곳에 있는, 부엌이 딸린 한 칸 요사채였다. 불목하니가 아궁이에 장작을 잔뜩 넣어 엉덩이를 대기도 힘들 만큼 방바닥은 뜨뜻했다.

큰 장식이나 치레가 없는 방은 이부자리가 얹힌 작은 화초장 하나만 구석에 놓여 있었다. 승방이라 장식은 소담스러웠다. 횃대에 옷을 걸더니 권문탁은 밖으로 나갔다. 잠시 후 머리에 묻은 물기를 닦으면서 방에 들어온 권문탁이 말했다.

"부엌에 물이 펄펄 끓고 있어. 오느라고 고단할 텐데 씻고 오렴."

낯선 집에 들어온 강아지처럼 몸을 움츠리고 방 안에 오도카니 앉아 있던 홍이가 기다렸다는 듯 일어나 문을 열고 나갔다. 홍이의 귀밑 털 아래 뺨이 홍조로 붉게 물든 것을 권문탁은 놓치지 않았다.

잠시 후 두 사람은 암자에서 내준 행자(行者)들이 입는 회색 승복을 입고 마주보며 앉았다. 둘 사이로 김이 모락모락 오르는 찻잔을 얹은 차탁이 놓였다. 권문탁의 표정은 담담했고, 목욕으로 피로를 씻어낸 홍이도 편안해보였다.

권문탁이 찻잔을 들어 한 모금 마시고는 말을 꺼냈다.

"조금 있으면 저녁상이 들어올 거야. 진수성찬이랄 순 없지만, 사찰 음식이니 정갈하겠지. 공양을 마치면 함께 법당으로 가자. 자리를 비워달라고 주지스님께 부탁했으니, 우리 둘만 있을 거다. 같이 부처님께 백팔 배를 올리며 우리의 소원을 빌자꾸나."

홍이는 고개를 들어 권문탁의 얼굴을 빤히 바라볼 뿐 아무런 대꾸가 없었다. 그녀의 얼굴로 체념이랄까 불안감이랄까, 알 수 없는 감정이 떠돌았다.

"불편한 것은 아니지?"

그제야 홍이가 애써 입을 열었다.

"어쩌시려는 건가요?"

다시 차로 입을 적신 권문탁이 차분한 어조로 대답했다.

"그냥 우리 물결이 흘러가는 대로 따라가기로 하자. 마음 같아서야 세상을 향해 모든 일을 다 털어놓고 싶지만, 그러면 풍파만 커지고 너나 네 가족들도 힘들어질지 몰라. 땅이 끝나고 하늘이 시작되는 이곳에서 우리들만의 정표를 나누었으면 좋겠구나. 하늘과 가장 가까운 곳이니 부처님도 우리 마음을 더 가까이서 듣고 축복해 주시겠지. 어떠니?"

홍이의 입술이 달싹거렸지만, 어떤 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권문탁이 알았다는 듯 홍이의 두 손을 꼭 잡았다. 그녀의 손은 가녀리게 떨렸지만 따뜻했다. 그 온기가 모든 걸 말해주었다.

"그래 땅이 주는 굴레는 다 털어버리고 부처님이 맺어주실 인연으로 우리 둘을 꽁꽁 묶기로 하자. 영원히 풀리질 않을 끈으로……."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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