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져진 것이 돌만은 아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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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져진 것이 돌만은 아니니
  • 남해타임즈
  • 승인 2019.12.12 14:38
  • 호수 67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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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9장 땅의 끝에서, 하늘의 시작에서 2

금산의 아침이 밝았다. 권문탁과 홍이는 보리암 후미진 승방에서 알뜰하게 스미는 햇살을 받으며 눈을 떴다. 묘시(卯時, 아침 5시~7시)는 훌쩍 지났을 시간이었다.


권문탁이 먼저 깼다. 햇살이 눈부셔 잠을 계속 청할 수 없었다. 촛불은 꺼져 있었다. 홍이가 촛불을 꺼 달라고 속삭이던 말이 떠올랐다. 사랑스런 홍이의 얼굴을 보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옆에 누워 곤히 잠든 홍이를 돌려보았다. 새근거리는 숨소리가 막 태어난 아기처럼 앙증맞았다. 구겨진 원앙금침을 들춰 올렸다. 두 사람 모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았다. 홍이의 봉긋한 젖가슴이 눈에 들어왔다. 분홍빛 젖꼭지가 호흡을 따라 오르내렸다. 저도 모르게 손이 가려는데, 낌새를 차렸는지 홍이가 번쩍 눈을 떴다. 자신의 벌거벗은 몸을 은근히 바라보는 권문탁의 시선을 느끼자 홍이가 눈을 감고 얼굴을 가렸다.


`이 사람이 이제 내 아내가 되었구나.`


초라한, 누구도 축복하지 않은 첫날밤이었어도 권문탁은 가슴이 뿌듯해졌다. 자신에게 영원히 지켜야 할 성채가 하나 세워진 기분이었다.


`결코 내 눈 밖에 네가 있게 하지 않겠어.`


서늘한 기운을 느낀 홍이가 그제야 이불이 반쯤 개켜져 있음을 깨닫고 이불깃을 잡으려고 했다. 권문탁의 손아귀에 잡힌 이불은 그녀의 몸을 가려주지 않았다. 반대편으로 몸을 틀자 아름다운 허리의 굴곡이 엉덩이까지 날아갈 듯 펼쳐졌다. 그녀의 몸은 치자 꽃 달콤한 향기로 촉촉이 젖어 있었다.


그 향기를 맡으려고 몸을 숙였다. 권문탁의 코끝이 살갗에 닿자 홍이가 기겁을 하며 몸을 들추었다. 그러다 갑자기 훌쩍거렸다.


"울지 마라. 네가 슬퍼해도 나는 어쩔 수 없어."


속삭이듯 다정하게 그녀의 어깨를 감쌌지만, 떨림이 그치진 않았다. 눈물이 가득한 눈을 두 손으로 훔치면서 홍이가 말했다.


"엄마 아빠에게 혼날 거예요"


첫날밤을 보낸 여자의 입에서 나온 첫 마디치고는 어처구니가 없었다.


"내가 잘 말씀 드릴 테니 넌 걱정 안 해도 돼."


그 말에 홍이는 사색이 되었다. 경기를 하듯 홍이가 외쳤다.


"절대로, 절대로, 절대로 말씀 드리면 안 돼요. 난 맞아 죽을 거야."


반응이 너무 격렬해 우선 달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알았다, 알았어. 진정해. 네가 원할 때 말하마."


좁다란 홍이의 어깨를 감싸자 홍이는 그대로 권문탁의 품으로 몸을 던졌다.
"그래주세요. 어떻게 하지. 어떻게 하면 좋을까."


홍이가 주문을 외는 무당처럼 열에 들 떠 중얼거렸다. 머릿결이 깃발처럼 흐드러졌다.


그 들뜸이 권문탁을 흥분시켰다. 온몸에 힘을 주며 홍이를 안았다. 뜻밖에도 홍이는 당연한 듯 두 손으로 권문탁의 목을 감쌌다.


"어떻게 하지. 하지만 너무 좋아."


다시 두 사람에게는 밤이 찾아왔다.


해가 금산의 정수박이를 더듬어 갈 즈음, 두 사람은 저만치 부소암(扶蘇巖)이 보이는 너럭바위 끝에 걸터앉아 두 다리를 흔들고 있었다. 시루떡을 짓이겨놓은 듯한 모습의 부소암은 얼핏 기괴한 인상을 풍겼다. 그러나 진시황의 맏아들로 태어나 비운에 죽은 부소의 일을 생각하면, 부소의 고뇌가 얽혀 있는 듯해 비감하기도 했다.


아버지에게 충언을 하다 쫓겨났고, 진시황이 죽으면서 그를 황위에 올리라고 유언했지만, 간신 조고(趙高)와 이사(李斯)의 모략 때문에 자살해야 했던 부소. 만약 그가 진나라의 두 번째 황제가 되었다면 역사는 어떻게 바뀌었을까? 홍이의 손을 잡고 불어오는 바람을 맞으며 권문탁은 엉뚱한 생각에 목을 맸다.


유배 온 평민의 딸을 사랑해, 반가(班家)의 자식으로서는 반역이나 다름없는 짓을 하고 있는 자신이 마치 2천 년을 훌쩍 넘어 부소가 환생한 듯해 바위의 모습이 남의 일 같지 않았다.


"바위 모습이 참 괴상해요. 그렇지 않아요?"


여전히 달콤한 치자 꽃향기로 유혹하면서 홍이는 천진난만한 아이처럼 호기심을 드러냈다.


권문탁은 머리를 가볍게 휘젓고 홍이의 어깨를 감쌌다.


"금산에 괴상한 모양의 바위가 한둘이니. 하지만, 우리가 괴상하다 생각하지 저 바위는 그렇지 않을걸. 자신의 모습을 대견해하면서 당당할 거야. 우린 모두 저 바위처럼 당당하고 떳떳해야 해. 모양이 흉측하다고 신분이 낮다고 남을 업신여겨서는 안 되지."


쥐고 있던 홍이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그녀는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첫날을 함께 지낸 홍이는 조금 달라졌다. 이제 홍이는 꺼리지 않고 권문탁을 바라볼 수 있게 되었다. 그것은 자포자기라기보다는 애써 얻은 것을 잃지 않으려는 안간힘 같은 것이었다. 세상이 자신에게 가할 위협에 흔들리지 않겠다는, 백척간두에 서서 자신을 지키려는 결기 같기도 했다.


홍이는 고개를 돌려 그들이 살고 있는 선소와 그 너머 이어마을, 더 멀리 자신이 떠나온 고향을 찾았다. 바위에 가려 보이지 않아도 변함없이 존재하듯이 나란 존재, 손을 잡은 남자의 존재를 분명히 느끼려고 애썼다.


그때 권문탁이 홍이의 손을 당기면서 시선을 돌리게 만들었다.


"홍이야. 저것 좀 봐라. 우와! 산 아래서 구름이 달려오고 있어."


금산은 상상도 못할 변신의 몸부림을 치고 있었다. 어디서 왔는지 알 수 없는 하얀 구름 떼들이 푸른 수목과 옥색과 비취빛으로 물든 바위를 삼키면서 산 정상을 향해 치닫고 있었다. 쏟아진 폭우가 메마른 황토밭을 삽시간에 늪으로 만들 듯 바다에서 밀려오는 운무(雲霧)가 금산 전체를 에워 쌀 기세로 온 산을 하얗게 물들였다.


홍이는 그 운무의 홍수가 죄진 자신에게 차꼬를 채우고 남자를 빼앗으려 달려드는 마군(魔軍)같이 느껴졌다. 두려움에 권문탁의 겨드랑이를 움켜쥐었을 때 구름의 파도는 발아래를 지나 두 사람의 머리 위로 홰를 치며 넘어갔다. 순식간에 세상은 하얀 구름의 감옥 속에 갇혔다.


이 놀라운 자연의 횡포에 권문탁도 놀라 너럭바위 위로 홍이를 끌어올렸다. 그러나 두 사람을 에워싼 것은 구름만이 아니었다. 코앞 바위마저 보이지 않아 손을 더듬기도 전에 후두둑 소낙비가 쏟아졌다. 차갑지는 않아도 거세 살을 팔고 들 듯 따끔거렸다. 빗방울이 아니라 구슬 더미가 머리를 덮치는 기분이었다.
어렵게 길을 밟아 둘은 부소암 뒤편에 있는 부소암(扶蘇庵)을 찾아냈다. 세상의 운무와 취우(驟雨)도 모두 자연의 섭리라는 듯 암자의 부처님은 미소를 머금은 채 두 사람을 반겼다. 두 사람은 문을 열어두고 비가 그치기를 기다렸다.


걸린 승복을 내려 갈아입었지만, 속까지 젖은 물기는 가셔지지 않았다. 홍이가 팔짱을 낀 채 추위를 덜어내며 물었다.


"이제 어떻게 하죠?" 오늘 아침 그녀가 권문탁에게, 아니 세상에 던진 질문이었다. "이 안개와 빗속에서… 우리는 무엇을 할 수 있죠?" 천근 만근의 무게가 그녀의 말을 옭아 묶었다.


권문탁은 대답 대신 벗어둔 옷을 뒤져 꼬깃꼬깃 접힌 종이 한 장을 꺼냈다. 종이도 비에 흠씬 젖어 있었다.


"홍이야. 이것 좀 봐봐."


홍이는 팔짱을 풀지 않고 시선만 옮겨 종이를 보았다. 뭔가가 쓰여 있었지만, 읽을 수 없었다.


"전에 박태수 포교가 와서 준 거야. 처음엔 무슨 뜻인지 몰랐는데, 얼마 전에 알아냈지. 네 오빠가 준 거라더구나."


홍이가 눈망울을 모아 종이를 뚫어져라 응시했다. 그림 같은 글씨가 삐뚤빼뚤 흘러가고 있었다.


一士橫冠 鬼神脫衣 十疋加一尺 小丘有兩足


"뭔지 모르겠지? 이런 글을 참요(讖謠)라 불러. 앞날을 예언하는 노래라는 말이지."


"무슨 뜻인가요? 어떻게 앞날을 예언했나요?"


"뜻으로만 보면 이래. 아무런 의미도 없지만 속뜻을 푸는 실마리지."


권문탁이 낭송하듯 천천히 시의 뜻을 새겨나갔다.


"한 선비의 갓이 삐딱하고, 귀신은 옷을 벗었네. 열 필에 한 척을 더했고, 작은 언덕에 두 발이 달렸구나."


어딘가 엉성하고 우스꽝스러웠다. 갓은 왜 삐딱하고, 귀신은 왜 옷을 벗었을까? 뒷말은 더욱 미심쩍었다. 문득 오늘 아침 발가벗었던 자신이 떠올라 얼굴이 붉어졌다.


권문탁이 홍이의 뺨을 살짝 꼬집으며 말을 이었다.


"첫 구절은 선비[士]의 머리에 비딱한 갓 삐침을 올렸다니까 임(壬)자가 돼. 귀신[神]이 옆에 붙은 옷을 벗었으면 신(申)만 남고, 열 필(十疋)을 아래위로 붙이면 주(走)자, 거기에 척(尺)을 더하면 기(起)자가 나와. 마지막으로 언덕[丘] 아래로 발이 두 개 달렸으니까 병(兵)자가 아니겠니? 이걸 묶으면 임신기병(壬申起兵), 임신년에 병란(兵亂)이 일어난다는 뜻이 돼."


홍이가 손가락을 꼽으며 물었다.


"올해가 신미년(辛未年)이니까 임신년이면 내년인가요?"


"그래 내년이지. 근자 북쪽 변방의 동태가 심상치 않은가봐. 홍경래(洪景來)란 사람이 다니면서 사람을 모은다더구나."


"사람을 모아 어쩌려고요?"


"기의(起義)할 작정일 거야. 당나라 때 황소처럼. 이 사람은 지역 차별, 신분 차별을 세상에서 없애자면서 사람들을 선동한다는구나."


"신분 차별?"


"그래. 나는 양반, 너는 평민, 이렇게 신분을 정해놓고 권력자들이 마음껏 백성들을 약탈하고 핍박하지. 이런 썩은 세상을 바로잡겠다는 거야."


"그런 세상이 과연 올까요?"


"세상이 뒤바뀔 때면 영웅이 나오기 마련이야. 지금이 뒤바뀌어야 할 때고."


홍이는 예리한 비수가 가슴을 파고드는 아픔을 느꼈다. 도련님은 지금 너무나 위험한 생각을 내뱉고 있었다. 갑자기 하얀 빗방울이 붉은 핏방울이 되어 떨어졌다. 어지러웠다.


그러나 권문탁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그가 홍이의 손을 덥석 쥐었다.


"홍이야. 우리 북쪽으로 가자. 신분도 없고 차별도 없는 그곳에 가서 부부가 되어 함께 무덤에 묻힐 때까지 행복하게 살자. 좋지?"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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