던져진 것이 돌만은 아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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던져진 것이 돌만은 아니니
  • 남해타임즈
  • 승인 2020.02.13 11:16
  • 호수 68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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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2장 어디서 무엇이 되어 만나리 3

 순조 11년(1811) 신미년의 마지막 달인 섣달 보름이 왔다. 다들 낡은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으려는 마음으로 분주했지만, 이 날 남해는 더욱 시끌벅적했다. 선원마을에서 벌어진 정판서의 고래등같은 기와집의 완공을 알리는 축하연이 벌어졌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남해가 자랑하는 집들이굿놀음 연희가 축원의 깃발을 높이 날리는데다가, 이웃 전라도에서도 흥겨움을 돕는 풍물패가 참여했다.

 인근에 사는 많은 주민들이 이 잔치를 구경하려고 몰려들었다. 며칠 전부터 부침개를 지지는 냄새가 골짜기를 진동했고, 돼지와 소는 몇 마리나 잡았는지 헤아릴 수도 없을 정도였다. 떡과 술들이 곳간마다 가득 찼고, 갖은 해물들이 싱싱하게 헤엄치며 축하객들의 구미를 동하게 만들었다.

 집들이굿놀음 매구패와 전라도 풍물패의 기량대결을 아는 이는 많지 않았다. 구경꾼들의 호응 소리가 우열을 가름하는 기준이었기에, 고을 사람들에게 그 사실을 알리지 않았다. 매구패들은 새로 장만한 복색을 정갈하게 입고 미투리를 신었다. 노랑과 파랑, 그리고 붉은 띠로 어깨와 허리를 두른 매구패들은 기와집에서 멀찍이 떨어진 개울가 둔덕에서 상모와 기물들을 꼼꼼히 챙겼다. 전라도 풍물패는 언덕에서 내려올 예정이었다.

 박태수와 차상두도 매구패에 합류했다. 박태수는 북을 둘렀고, 차상두는 소고를 들었다. 유순심은 연풍대와 열두 발 상모를 연이어 해야 해서 여느 때보다 바지런히 움직였다. 조래중 이말심 노인과 동냐치 이춘아 노인도 오늘 적선 주머니를 가득 채우겠다며 단단히 별렀다.

 해가 기웃할 즈음이 되면 매구패가 먼저 굿놀음을 펼쳐야 했다. 아침에 매구패와 잡색(雜色)은 이어마을 움집에서 한 차례 준비 공연을 가졌다. 모든 것이 흡족했다. 기와집 쪽에서 붉은 깃발이 펄럭이자 상기된 얼굴로 상쇠 어른이 목청을 다듬으며 말했다.

 "지난 몇 달 동안 땀 흘릿던 갤과가 오늘 훤히 드러나여. 허나 맹심할 껀 오늘 우리가 치는 매구는 갱쟁이 아니라 놀이라는 거여. 저 전라도 풍물패는 우리 적이 아니라 벗임을 잊어서는 안 되제. 우린 우리의 능력과 솜씨를 마음껏 보여주면 되는 기고. 풍물패에게도 아낌없는 응원을 해야 혀. 이기면 좋것지만 잔칫날 눈살 찌푸리는 일은 있어서는 안 되여. 오늘 최선을 다함시롱 놀이를 맴껏 즐기자구. 자, 내 선창에 따라 다들 외쳐야. 놀아보자! 매구!"

 매구패와 잡색들의 함성이 하늘을 찌를 듯 울려 퍼졌다.

 경사가 완만한 언덕길에서 박태수가 흥겨운 몸짓 치레를 돌면서 차상두에게 말했다.

 "다드래기굿이 끝나믄 연풍대가 있실 거이고, 이어 순심이가 열두 발 상모 돌릴 채비를 할 거여. 그때 매구패와 잡색들이 떡과 술을 돌림시롱 관객들과 군사들의 시선을 사로잡제. 그때 우린 몰래 집을 빠져나와 언덕을 넘어 바닷가로 갈거여. 쌔이 움직여야혀. 알것제?"
 소고를 치던 차상두가 고개를 끄덕였다.

 첸지란 첸지란 지란 지란 첸지란!

 구자효 상쇠 어른의 꽹과리 소리와 함께 굿놀음은 시작되었다. 당산나무에서 제를 지냈고, 우물을 돌며 가뭄 없는 세상을 송축했다. 그리고 솟을대문을 지나 본격적인 집들이굿놀음이 시작됐다. 그때쯤 날은 어둑해져 있었다.

 상쇠 어른의 주선으로 배 한 척이 마련되었다. 평안도가 아니라 청나라까지 가도 끄떡없을 튼튼한 목선(木船)이었다. 한 달 넘어 먹을 음식과 식수도 준비했다. 옥진이와 홍이는 목선에서 기다릴 참이었다.
 이 날 이른 아침 이어마을로 가기 전에 박태수가 선소 정자집을 들렀다. 홍이가 못 올 테니 의아하지 않도록 권문탁을 납득시켜야 했다.

 "도령님. 오늘 홍이는 못 오네예."
 글을 읽고 있던 권문탁이 책을 덮으며 물었다.
 "무슨 소린가?"
 권문탁이 계획을 알더라도 고발하지 않으리라 믿었지만, 일말의 불안감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박태수가 어렵게 말을 꺼냈다.

 그 이야기는 한동안 이어졌다.

 "일이 이리 되얏시니 도령님께서도 눈감아 주시믄 어떨까예."
 눈을 감고 묵묵히 듣던 권문탁이 박태수가 말을 마치자 눈을 떴다. 뜻밖에 그의 표정에는 어딘가 감개무량한 기색이 풍겨 나왔다.

 "언제쯤 배가 뜰 건가?"
 "술시(戌時, 오후 7시에서 9시 사이) 시작 언저리가 아닐까 싶네예. 동풍이 불 무렵이지예."
 "홍이는 어디 있을까?"
 "대사천이 바다로 들어가는 근처지예."
 "알았네. 부디 몸조심하시게. 무사히 평안도에 닿길 천지신명께 빌겠네."
 박태수와 권문탁은 두 손을 굳게 잡고 이별의 인사를 대신했다.

 술시가 시작될 무렵 홍이는 옥진과 함께 대사천 끝자락에 서서 박태수와 오빠가 오기를 기다렸다. 굿놀음 노는 함성이 어렴풋이 들려왔다. 지금쯤 저 언덕을 넘어 두 사람이 나타나야 했다.

 홍이는 도련님과 작별 인사조차 나누지 못하고 떠나는 게 못내 마음에 걸렸다. 박태수 포교가 절대 발설을 하면 안 된다고 해서 입도 뻥끗하지 못했다. 어젯밤 귀가할 때 사정을 모르는 도령님은 내일 일찍 오라며 잡은 손을 놓지 못했다.

 그날 밤 홍이와 차상두는 떼도 없는 부모님 무덤에 들러 하직 인사를 올렸다.

 "아빠, 엄마, 좋은 세상이 오면 꼭 다시 찾아와 잘 모실게요. 그때까지 두 분 손 놓지 말고 편안하게 지내세요."
 눈치 없는 눈물이 두 볼을 타고 흘러내렸다. 차상두가 억지로 끌고 집으로 향했다.

 이제 남해를 떠나면 언제 다시 도련님을 만날 수 있을까? 아니면 영영 생이별을 하는 것일까? 엄마가 홍이에게 남긴 비단과 꽃신이 든 보자기를 품에 안고 홍이는 마음을 추스르지 못했다.

 그때 저쪽 길에서 누군가가 두 사람에게 다가왔다.

 "에그머니, 들킨 거 아녀?"
 옥진이 기겁을 하며 홍이의 손을 잡았다. 저벅저벅 다가오는 사람은 보름달 달빛을 환하게 받은 권문탁이었다.

 "도련님!"
 "홍이야!"
 두 사람은 옆에 옥진이 있는 것도 아랑곳 않고 부둥켜안았다. 눈치 빠른 옥진이 기침을 하며 배에 올랐다.

 "홍이야. 긴 말 할 시간이 없구나. 무탈하게 평안도로 가거라. 마음 같아선 함께 가고 싶지만, 네가 무사히 닿게 뒤 막음을 할 사람이 있어야지. 진달래가 필 즈음이면 우린 다시 만나게 될 게야."
 "기다릴게요."
 다시 두 사람은 서로를 껴안았다. 차마 떨어지지 못한 채 이대로 부부석(夫婦石)이 되기를 홍이는 갈구했다.

 그때 평복으로 갈아입은 박태수와 차상두가 허겁지겁 언덕을 넘어왔다. 권문탁을 보자 두 사람은 돌부처가 되어 걸음을 멈추었다.
 권문탁이 웃으며 두 사람에게 다가갔다. 차상두의 손을 잡으며 권문탁이 말했다.

 "상두. 그리고 박 포교. 부디 몸조심하게. 나도 곧 뒤따를 거네. 그리고 상두, 자네와 나는 체구가 비슷하니, 서로 옷을 갈아입도록 하지, 도령복이 불편할진 몰라도 검문이라도 받게 되면 도움이 될 게야. 그리고 내 호패(號牌)도 가져가게. 양반 신분으로 가장하면 함부로 대하진 못하겠지."

 박태수로서는 썩 좋은 방책으로 여겨지지 않았지만 실랑이를 벌일 시간이 없었다. 그렇게 옷을 바꿔 입자 두 사람은 홍이를 데리고 목선에 올랐다. 노를 저어 해변을 빠져나가자 활짝 돛이 올랐다. 권문탁은 쉬지 않고 손을 흔들었다.

 그날 저녁 관아에서는 큰 소동이 일었다. 조옹집의 시체가 발견된 것이다. 아전이 혹시나 싶어 포졸들과 함께 조옹집의 집을 기웃거리다 고약한 썩은 냄새를 맡았고, 광문을 열고 들어가 이불 속에 죽어 있는 조옹집을 찾아냈다.

 "차덕구의 아들놈 차상두의 짓이 분명하다. 차상두는 어디 있느냐?"
 현령이 소식을 듣고 시체를 확인한 뒤 따졌다. 아전이 선원마을에서 있는 집들이굿놀음 소식을 전했다.

 군장을 갖춘 현령이 정판서의 집으로 말을 몰았다. 호위군관이 뒤를 따랐다. 정판서의 집에 차상두는 없었다. 박태수도 함께 사라졌다.

 "이런 때려죽여도 시원찮을 놈들. 당장 찾아내라."
 그때 누군가 두 사람이 산 넘어 대사천으로 가는 것을 보았다고 알려주었다. 현령과 군관은 바닷가로 말을 몰았다. 산을 넘었을 때 저 아래 해안에서 손을 흔들고 있는 차상두가 보였다. 군관이 뒤쫓으려 하자 현령이 손으로 막았다.

 "그럴 것 없다. 저런 화근덩어리는 잡아봐야 일만 복잡해질 뿐이야. 일격으로 끝내는 게 좋아."
 현령은 말 뒤춤에서 활과 화살을 뽑았다. 시위가 팽팽하게 당겨졌고, 바람을 가르며 화살이 날아갔다. 화살은 손을 흔들던 차상두의 등에 정확하게 박혔다. 쓰러진 차상두는 잠시 버둥거리다 잠잠해졌다.

 "으하하하! 봤느냐? 내 활 솜씨가 어딜 가겠는고? 단 한 발로 화근을 뿌리 뽑지 않았느냐. 으하하하!"
 네 사람을 태운 목선은 바람을 타고 바다를 가르며 넘실넘실 나갔다. 고물에 서서 홍이는 눈에서 점점 멀어지는 남해의 아름다운 산천을 하염없이 지켜보았다. 저곳에 홍이는 부모님을 묻었고, 또 도련님을 만났다. 원한과 환희가 사무친, 잊을 수 없는 땅이었다. 둥근 보름달은 아빠와 엄마의 웃음 짓는 얼굴이 되기도 하고, 따뜻한 시선을 담은 도련님의 얼굴이 되기도 했다.

 "홍아. 그만 들어가자. 이러다 몸 상할라. 갈 길이 멀어요."
 옥진이 다가와 걱정스럽게 말을 건넸다.

 "곧 들어갈 테니 아씨 먼저 들어가세요."
 옥진이도 잠시 달빛에 젖은 남해를 바라보다 안으로 들어갔다.

 뱃전에 서서 그리움에 가득 찬 얼굴로 홍이는 남해에 있는 도련님에게 마음의 기원을 들려주었다.

 "도련님. 어서 빨리 제게 와 주세요. 새로운 세상에서 우린 다시 만날 거예요. 그날까지 저는 무슨 일이 있어도 도련님을 기다리렵니다."

 남해는 환한 보름달 때문에 더욱 아름답게 빛났다.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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