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산 선생의 소설 중 남해도를 배경으로 쓴 소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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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산 선생의 소설 중 남해도를 배경으로 쓴 소설
  • 남해타임즈
  • 승인 2020.06.22 18:16
  • 호수 70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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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산 김정한 선생과 남해, 그리고 남해의 문화 2 │ 강달수 시인

한국 민족문학과 리얼리즘문학의 대표적인 인물 중 한 분인 요산 김정한 선생은 6년 6개월(1933년 9월~1940년 3월)동안 남해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했다. 요산문학제 운영위원이었던 강달수(재부향우) 시인에 따르면, 요산 선생은 남해에서 룗월광한룘과 룗낙일홍룘, 그리고 룗회나뭇골 사람들룘 세 편의 소설을 남겼다.
2004년 당시 부산작가회의에서도 그 해 10월 제7회 요산문학제 기념으로 요산문학의 현장 표지목을 남변리 회나무 밑에 세웠다. 그러나 표지목은 세월의 풍파를 이기지 못하고 5년 전쯤 사라졌다. 이에 본지는 2017년 8월과 올해 5월 두 차례에 걸쳐 표지목 복원을 거론한 바 있으며 최근 남해군과 남해문학계에서도 이에 대해 공감을 나타냈다.
본지는 요산 김정한 선생과 소설 룗횟나무골 사람들룘에 대한 구체적인 내용이 필요하다고 판단해 강달수 시인에게 원고를 요청했다. 강 시인의 `요산 김정한 선생과 남해, 그리고 남해의 문화`를 네 차례에 걸쳐 연재한다. <편집자 주>


강  달  수시인
강 달 수
시인

요산 선생이 남해도를 배경으로 쓴 소설은 「월광한」과 룗낙일홍룘 그리고 룗회나뭇골 사람들룘 세 편이다. 룗월광한(月光恨)룘과 룗낙일홍(落日紅)룘은 1940년에 발표되었고, 룗회나뭇골 사람들룘은 1973년에 발표되었다.
남해를 배경으로 한 대표적인 작품으로 룗회나뭇골 사람들룘을 들 수 있다. 요산 선생은 1933년 9월 26일에 남해공립보통학교(현재 남해초등학교)에 교원으로 첫 취임을 했고 1939년 5월 남명공립보통학교로 전근 갈 때까지 거의 6년여를 남해읍에서 생활하셨다. 그 기간 동안에 단편소설 룗사하촌룘(1936년 1월)이 조선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됐고, 조선일보에 룗옥심이룘(1936년)와 룗항진기룘(1937년)를 연재했다.
요산 선생이 남해초등학교에 재직하고 있을 당시 시대적 배경은 창씨개명이 강요되던 1940년 봄으로, 3·1만세운동으로 피해를 본 박선봉 노인과 송털보 영감의 이야기이다. 읍 회나뭇골이 룗회나뭇골 사람들룘의 공간적 배경이고, 요산 선생의 남해 세 작품 중 유독 이 소설만 남해를 떠난 먼 훗날 1973년 9월에 발표됐다. 이 작품의 서두에서 읍내를 묘사하고 있는 것을 보면, 요산 선생의 대다수 작품들의 특성처럼, 당시 시대상을 소상하게 들여다볼 수 있을 정도로 세밀하고 구체적으로 묘사하고 있다.
이 회나뭇골의 회나무는 적게 잡아도 300년은 넘었다는 것이 동네 어른들의 말씀이다. 그리고 지금도 남변리에서는 매년 음력 10월 10일이면 회나무 옆 마을회관에서 당산제를 지내며 한 해의 안녕과 풍년을 기원하고 있다.
여기서 s읍성이라는 것은 예부터 읍은 성내라고 불려졌고, 대티는 지금의 죽산마을이다. 그리고 소설 속 효자문도 지금까지 삼거리에 그대로 잘 보존되고 있다. 또한 소설 속에서 박노인이 백정 출신이고 주로 회나뭇골 주변에는 무당이나 백정들을 나타내는, 소위 칠천들이 모여 살았다는 것도 사실이다. 현 해양초등학교 주변이 그 시절 도살장이 있었던 곳이고, 지금도 그 인근에는 전국적으로 유명한 한우 명품 브랜드인 `화전 한우`가 그곳에서 쇠장수들에 의해 전국적으로 고가에 팔려 나간다. 작품 속 신사가 있었던 곳에 지금은 국궁 활터가 들어서 있다.
남해문화원장을 오래도록 역임하고 남해향교 전교도 지낸 이동선 원장님(1932년생, 2014년 작고) 말씀에 의하면, 남해읍에는 큰 회나무가 두 그루 있는데, 한 그루는 남해전문대학 후문 입구에 있는 남변리에 소재한 회나무이고 또 한 그루는 남해읍 서변리 130번지 일원에 있던 회나무인데, 소설 속의 회나무는 후자 같다고 추측을 했다.
그러나 130번지 일원에 있던 회나무는 그 사실을 뒷받침할 만한 증거가 없고 이동선 선생도 본 적이 없는 것으로 미루어, 아마도 요산 선생도 이미 불타 없어진 회나무 대신 현재 군에서 특별 보호수로 지정하고 있는 남해대학 후문 입구의 회나무로 이입하여 소설을 썼던 것으로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지금도 남변리 회나무 인근 도로가 회나무 거리로 불리고 있고 도로를 확장하는 과정에서도 영험한 나무라고 하여 이 나무는 손을 대지 않고 도로를 우회적으로 확장하였다. 또한 요산 선생이 근무하였던 남해초등학교와 남해 거주지도 그 근처라는 점도 그 사실을 입증하는 중요한 근거가 될 수 있을 것이다.
필자도 어느 곳의 회나무가 작품 속의 진성 회나무인지 무척 고민을 많이 했다. 소설 속 묘사나 여러 가지 정황으로 미루어 서변동에 위치한 회나무가 작품의 소재일 수도 있지만, 정확한 자료가 없는 실정이었다. 또 이미 소실되었기 때문에 필자가 요산문학제 운영위원으로 활동하고 있을 2004년 당시 부산작가회의에서도 2004년 10월 제7회 요산문학제 기념으로 세운 요산문학의 현장 표지목을 전자의 남변리에 세웠다. 그 당시 요산문학제로 시행된 남해문학 기행에서 요산문학제의 운영위원이기도 했지만 고향이 남해인 관계로 필자도 선발대로 사전에 남해로 내려와 남해에서 최초로 `요산문학의 현장`이라는 표지목을 세우는 영광스런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그때 회나무 앞에서 요산문학의 현장 표지목 제막식은 금번(2020년 4월 15일)에 사천·남해·하동지역에서 제21대 국회의원으로 당선된당시 하영제 남해군수와 최채민 군의회의장도 참석해서 자리를 빛냈는데, 순전히 필자와의 인연으로 일요일이었는데도 불구하고 참석했다. 이 자리를 빌려 다시 한번 감사드린다. 나중에 안 이야기이지만 그 당시 고향 후배 기자들이 요산문학제에 대해 대대적으로 홍보를 해 주었는데, 그 신문을 보고 요산 선생의 당시 남해초등학교 제자 되는 분들도 몇 분 참석했다고 한다. 그 당시에는 그분들이 말씀을 안 하셔서 아무런 인터뷰도 못하고 대접도 제대로 해 드리지 못한 것이 지금도 송구하고 큰 아쉬움으로 남는다. <다음호에 계속>

강달수 시인 약력

1997년 <심상> 등단.
동아대학교 대학원 문예창작학과 졸업.
사)부산광역시인협회 부이사장, 부산사하문인협회 회장, 김민부 문학제·김민부 문학상 운영위원장, 강달수 시창작교실 원장.
전)화전 문학회장, 재부남해군향우회 대외협력분과 위원장·문화분과 위원장 역임.
시집 : 룗라스팔마스의 푸른 태양룘, 룗몰디브로 간 푸른 낙타룘, 룗달항아리의 푸른 눈동자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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