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필적 선의에 대한 기억
상태바
미필적 선의에 대한 기억
  • 남해타임즈
  • 승인 2020.12.01 14:35
  • 호수 722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독자기고 │ 정해찬 남해군선거관리위원회 선거주무관
정  해  찬남해군선거관리위원회 선거주무관
정 해 찬
남해군선거관리위원회 선거주무관

군청에서 근무할 때의 일이다. 무더운 여름날 아직 얼굴에 솜털이 가시지 않은 청년이 행정과로 들어왔다. 민원인인가 싶었는데 이내 사무실 가운데에 상기된 얼굴로 서더니 이마의 땀을 한번 훔치고는 다짜고짜 자신을 소개했다. 미대에 다니는 대학생이며 지금 남해를 여행 중인데, 자신이 그린 그림을 `버스킹`해 팔아 여비를 마련 중이라고 이야기했다. 청년의 얼굴에 흘러내리는 땀과 다소 떨리기는 했으나 당당한 태도에 누구도 그의 말을 제지하지는 못했다. 이내 청년은 보따리에서 그림을 몇 점 꺼내어 자신의 작품에 대한 설명을 이어 갔다. 그림은 대부분 추상화였고, 그림을 어떤 생각들을 하며 그렸는지를 열심히 설명했다.
그러나 그의 버스킹이 끝나도록 누구 하나 그의 그림을 사겠다는 사람은 없었다. 나는 보따리를 챙겨 사무실을 나가는 청년을 따라가 복도에서 불러 세웠다. 그리고 다른 그림을 더 볼 수 있는지 물었다. 그의 나머지 그림에 대한 이야기를 더 듣고 나는 작품 두 점을 구입할 테니 가격이 얼마인지 물었다. 청년은 생각해둔 가격이 없었는지 잠시 당황하는듯하더니 합하여 10만원이면 되겠다고 했다. 작품 두 점을 10만원에 내어놓고도 송구하다는 표정이 청년의 얼굴에 역력했다. 나는 그가 불러주는 계좌로 15만원을 송금하고는 잘 가시라는 인사만 하고는 그림을 들고 사무실로 들어왔다.
후에 들은 바로는 행정과에 오기 전 이미 청년은 다른 부서에서도 그림 버스킹을 했고 한 점도 팔지 못했다 한다. 어쩌면 내가 산 그림이 그 청년에게는 마수걸이이자 마지막 판매였을지도 모른다. 추상화를 감상할 만한 미감은 나에게는 없었지만 그 작품들을 구입한 것은 청년의 용기가 헛된 일이 되지 않았으면 하는 바람이었고, 또 실망한 얼굴로 남해를 떠나는 청년의 모습을 상상하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비슷한 경험은 이후로도 많았다. 자선단체의 기부 요청이나 보따리상의 방문판매나 길거리 걸인의 동전 바구니도 마찬가지였다. 외면하려 노력하지만 이따금 자선단체에 기부를 하기로 마음먹어버릴 때가 있고, 방문판매상의 조악한 제품을 그냥 구입해주기도 하며, 지나온 걸음을 되돌려 주머니에 남은 지폐 몇 장을 걸인의 동전바구니에 놓아주고 말 때가 있다. 가끔 그들의 씁쓸한 뒷이야기에 허탈감을 느끼면서도 이따금 자신 앞에 다가온 선의의 기회 앞에 사람들은 의외로 `미필적 선의`를 저지르고(?) 만다. 선의는 달콤한 것이기 때문이다.
정치후원금을 홍보하겠다는 이 글을 쓰면서 생각한다. 정치는 자주 국민을 실망시키지만, 그리해 새삼 그들을 후원한다는 것은 무척이나 마뜩찮은 일이지만 그날의 청년처럼 땀에 젖은얼굴로 제 정책을 알리며 송구한 얼굴로 후원금을 청하는 어느 정치인을 보게 되는 날이 온다면 나는 또다시 그날의 달콤한 선의의 기억 앞에 흔들리고 말 것이라는 것을 말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