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소가 된 어린이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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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가 된 어린이날
  • 남해타임즈
  • 승인 2021.05.07 14:25
  • 호수 7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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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경의 남해일기

주렁주렁 꽃을 달고 있던 나무들은 어느새 짙은 녹색잎으로 나무터널을 만들어 세상은 마법처럼 변하게 한다. 유독 기념일이 많은 5월, 가정의 달이다.
5월 1일, 근로자의 날이 무색하게 아침 일찍 근무를 나와 노동의 신성함을 시설의 한구석에서 혼자 만끽한다.

5월 5일은 소파 방정환 선생님께서 일찍이 아이들을 나라의 보배로 정한 어린이 날이다. 아이들은 4월의 끝자락부터 어린이날 선물 리스트를 적기 시작한다. 작게는 초콜릿부터 샤프펜슬, 큰돈이 들어가는 검도 호구세트, 닌텐도게임기 들이다.

"엄마, 어린이날 선물은 내가 원하는 걸로 해 주시면 안돼요?"
"엄마가 어렸을 적엔 어린이날에 마늘종 뽑으러 온 식구들이 논으로 소풍을 갔는데, 선물은 무슨."
"엄마, 자꾸 옛날 이야기하면 꼰대 소리 들어요."
어른들이 경제활동의 주축에 있지만, 아이들이 경제생활 주인공이다.
바야흐로 때는 1980년대, 어린이날 아침이면 마을회관에서 어김없이 방송이 울려퍼진다. `회관에서 알려드립니다. 어린이가 있는 가정에 알립니다. 동네청년회에서 준비한 선물이 있으니 어린이 여러분들은 한 명도 빠짐없이 회관으로 나와 선물을 받아 가시기 바랍니다.`

앞다투어 골목길을 한달음에 달려 마을회관에 도착하면 스케치북, 줄공책, 초코파이, 우유, 사탕류, 과자류를 넣은 선물꾸러미가 우리를 반겨주었다. 아버지 고향인 남해를 찾아 할머니집을 방문한 도시아이들도 동네의 아이들과 똑같이 선물꾸러미를 하나씩 주었으니 시골인심은 언제나 할머니 품처럼 넉넉했다.

지난날 어린이날마다 선물을 받던 남동생은 읍내의 아파트에 살면서도 마을청년회 총무를 맡아 전통을 이어나가고 있다. 스마트 시대로 바뀌어도 선물꾸러미는 작은 학용품과 과자류로 변함없다. 남동생과 가까이 살고 있는 누나라서 해마다 어린이날 선물꾸러미를 함께 포장한다. 전통을 지켜온 중촌청년회 덕에 나도 덩달아 봉석 포장의 달인이 되고 있다. 꾸러미의 물품은 변함없지만, 선물을 받는 어린이들은 해마다 줄어들고 있다.
어린이날 즈음이면 마늘 논엔 황금모자를 둘러쓴 마늘종이 우후죽순으로 올라왔다. 어린이가 보배가 아니라 한땀 한땀 바늘로 마늘줄기를 찔러 상품을 만들고 가정경제에 도움이 되던 마늘종이 큰 대접을 받던 시절이었다.

1987년 어린이날, 그날도 마늘 논으로 소풍을 가기 위해 아빠는 이미 물통까지 챙기고 기다리는데, 작업복 입고, 모자 쓰고, 새참 챙겨야 할 엄마의 행동은 아주 굼뜨다. 그 이유는 이웃집 아저씨가 오시고서 밝혀졌다. 이웃집과 우리집의 어린이 7명과 어른 4명이 어린이날 기념으로 남해대교에 놀러 가자시는 거다. 아이들은 재빨리 옷을 챙겨 입고 골목길에서 기다리고, 한사코 놀이를 거부하신 아빠를 봄볕이 포근하다 못해 강렬하던 마늘밭에 홀로 세워두고 우리는 이웃집 소차를 타고 남해대교로 떠났다.

말이 소차지, 깔끔함으로는 대한민국에서 둘째가라면 서럽던 이웃집 아저씨는 물로 씻고, 건조해서 장판까지 깔아 고급세단 못지 않은 차에 시동을 걸었다. 이웃집의 막내만 똥차타고 놀러간다고 쪽팔린다, 우리가 소냐? 하고 난리가 났다. 우리 사남매들도 하고 싶은 말이 있었을 것이나 이웃집 소차라도 타고 놀러가는 어린이날 기념일이라서 입을 꼭 다물고 소처럼 있었다.

남해대교 아래 광장의 우글거리는 사람들 사이로 뛰어다니고 남해충렬사에 들르고, 잔디광장은 도시락 먹기에 안성맞춤인 자리였다. 점심식사 이후엔 광양바다까지 돌고 온다는 유람선을 타기로 의견이 모아졌다. 우리집은 이웃집보다 아이가 한 명 더 많아 비용이 많이 들 것이라는 내 생각에 나는 멀미를 핑계로 엄마와 잔디밭에 남았다. 가난은 가르쳐주지 않아도 어린 나를 철들게 했다. 저녁은 하루종일 마늘종과 사투를 벌인 아빠도 함께 고깃집에서의 외식을 했다.

그 이후론 어린이날에는 마늘종이 꽃처럼 올라오던 마늘밭으로 소풍을 가고, 그날 저녁은 고깃집에서 외식을 하는 것으로 어린이날을 보냈다. 요즘 같으면 아동학대로 걸렸으려나? 의류와 가방, 장난감, 문구류, 먹을거리들을 입만 떼면 가질 수 있는 있는 물질만능 시대에 살고 있지만, 부족했지만 나눠 쓰고, 함께 먹던 그때 그 시절이 정말 호시절이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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