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술의 보물섬
상태바
예술의 보물섬
  • 남해타임즈
  • 승인 2021.07.23 11:16
  • 호수 75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연경의 남해일기

 "엄마,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세요?"
 "오늘 화요일 아이가."
 "아니, 요일말고 어떤 날인지 묻는거예요."
 "우리식구 중에 생일은 아이고, 은찬이하고 관련있는 날이가?"
 "네."
 "체험은 저번에 다녀왔꼬, 도저히 생각이 안나는데…"
 "엄마, 저 오늘 학교에서 시험치는 날이잖아요."
 "아… 무슨 과목 시험치네? 그래도 엄마가 미역국은 안 끓였다 아이가. 우리딸 문제 끝까지 읽고 시험 잘 쳐."
 
 나는 일을 다닌다는 핑계로, 아이가 스스로 한다는 안도감으로, 아직 초등학생이라는 이유로 아이의 학업에 크게 관여하지 않았으니 내심 서운했던 모양이다. 국어, 영어, 수학 시험을 친다는 딸에게 늦은 격려를 하고, 내 학창시절 생각을 떠올렸다.
 
 나는 유독 미술과목에 취미가 없고, 미술 실기시간이 그렇게도 싫었다. 세심하게 꽃술까지 그려넣은 친구들의 정물화가 부러웠고, 녹음이 짙은 큰나무는 금방이라도 그늘을 만들어낼 것 같은 친구들의 풍경화가 너무 사실같았다. 
 
 나른한 오후 미술시간, 미술선생님이 교탁위에 올린 석고상은 백옥같은 피부에 굵은 곱슬머리, 계란형 얼굴을 한 조각미남이었다. 미술재료는 하얀도화지에 4B연필이 전부인데, 명암을 넣어 입체감을 살린 석고데생을 하는것이 최종 목표였다.  종이위에 사각사각 연필이 스쳐가는 소리만 들렸다. 손재주라곤 눈을 씻고 봐도 찾을 수 없는 나는 곁눈질로 미술학원을 다니던 친구의 폼을 관찰했다. 4B연필을 허공에 올려 손가락으로 가늠해 도화지에 앉힐 석고상의 비율을 고뇌하는 미술학도의 흔적이 보였다. 나도 심호흡을 해가며 연필을 길게 잡고 석고상을 재단해봤다.
 
 일단 계란형 얼굴부터 종이 중앙에 그려넣고, 풍성하게 컬이 있는 머리카락을, 쌍커풀 없는 눈과 꽉다문 입술, 나는 최선을 다해 직선과 곡선의 조화로 박력이 넘치는 석고상을 그려내고 그 완성에 심취해 있었다.


 슬리퍼 소리를 내며 학생들의 결과를 살펴보시던 미술선생님의 발걸음이 내 책상 앞에서 멈췄다.


 "이걸 석고데생이라고 그렸니. 웬 로보트를 그려놨노. 다시 그려라."
 로봇소리에 쥐구멍에라도 숨어버리고 싶을 만큼 창피한데, 다시 그리라는 소리는 더 싫었다. 이미 똥손인 내가 다시 그린다고 해서 더 나아질리가 없으니 로봇데생을 제출해버린 기억이 났다. 나는 지금도 그림 잘 그리고, 색깔에 감각있는 사람이 그렇게나 부럽다.
 아이들이 어릴 땐 주말이 되면 친정으로 자주 갔다. 아이들의 발소리 걱정하지 않고, 엄마가 해주는 밥 먹고 쉬면 하루가 순식간에 지나갔다. 문구점에 들러 아이들이 다양하게 고른 칼라점토를 사서 도착한 친정은 이미 하우스였다. 동네할매들은 화려한 동양화에 심취하고, 우리는 거실구석에서 점토만들기를 시작했다. 빨강, 파랑, 노랑, 검정, 하양으로 은찬이는 바나나를 만들고, 민찬이는 공을 만든다고 파랑색 점토를 뚝 떼어서 손바닥으로 비비고 비벼서 동그랗고 파란 공을 만들었다.
 
 "우리, 과일 만들어볼까?"
 "좋아. 나 포도 만들래."
 "그래, 민찬이가 좋아하는 포도를 만들고, 은찬이가 좋아하는 귤도 만들자."
 "포도는 무슨색이야?"
 "보라색."
 "엄마, 보라색이 없는데 어떻게 해요?"
 "자, 엄마 따라서 지금 없는 색을 한번 만들어보자."
 "빨강과 파랑을 섞으면 보라색, 빨강과 노랑은 주황색, 파랑과 노랑은 초록색, 팔강, 파랑, 노랑은 갈색."
 아이들은 자유자재로 색을 만들어내는 엄마를 신기해하며, 마술사 같다며 환호성을 질렀다.
 한쪽에서 화투 삼매경에 빠져있던 할매들이 우리들의 난리굿판을 보며 한마디 하신다.
 "연자너메는 삘건색허고 퍼런색을 섞으몬 보란가 색이 나오는걸 알았능가?"
 "우리때는 찰흙도 개우 구해서 만들고, 색연필이나 오데 따로 있었능가. 요새는 아~들 키우는것도 밸걸 다 알아야 헝께,  세상따라 살아야제. 어서 패나 디비소."
 
 석고상을 로봇데생을 그리던 미술빵점 김연경 학생은 아이들을 키우면서 조색을 자유자재로 하는 만능엄마가 되었다. 그것도 아이들이 학교 가고 나선 몇가지 공식만 도돌이표로 써먹었던 것이 들통나고야 말았지만.


 남해에서는 누구나 천연조색사가 된다. 초록도 나무이파리색, 풀잎색, 시금치색이 제각기 다르다. 파랑도 맑은날의 바다색, 비온뒤의 진회색, 물빠진 바다의 색이 다르다. 화려한 봄꽃들과 녹색의 보색을 이루는 하얀 여름꽃들은 예술의 섬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닌 남해가 만들어 낸 빛깔이다.
 
 미술을 못했어도 그림을 볼 수 있는 마음, 미술을 못했어도 전시를 갈망하는 노력, 미술을 몰라도 예술가들의 혼을 이해할 시간들이 보물섬을 더 빛나게 하지 않을까. 여전히 미술은 모르지만, 남해에서 열리는 전시활동을 하나씩 알아가는 즐거움이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