깎아 놓은 밤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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깎아 놓은 밤톨
  • 남해타임즈
  • 승인 2021.09.23 11:57
  • 호수 7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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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경의 남해일기

 고불거리는 라면머리를 좋아하는 아들이 오랜만에 미용실을 다녀왔다. 파마한 컬이 잘려 나갈까봐 머리카락 자르는 것을 싫어하지만 추석을 앞두고 머리손질은 당연했다. "아이구, 우리 아들 깎아놓은 밤톨 맨키로 참말로 예삐다." "엄마, 나는 예쁜게 아니라 멋지다고 해주세요." "예쁜거나 멋진기나. 엉덩이나 궁디나. 머리를 덮어쓰고 댕기다가 벌초를 해놓으니깐 시원하니 얼마나 좋네."
 
 추석이 다가오면 문중마다 산소의 벌초가 시작된다. 한여름의 땡볕과 바람, 줄기차게 내리는 빗물까지 받아 삼켜 묘소의 풀들은 논밭의 작물보다 더 무성히 자라난다. 예취기를 사용하기 전에는 낫으로 수작업을 했는데, 벌초하는 날 아침이면 마음부터 바빠온다. 
 
 창고의 연장함에서 낫을 꺼내 집 한켠에 마련된 수돗가에서 숫돌에다 물을 뿌려 낫을 갈고, 굳은살 박힌 엄지손가락 지문으로 낫이 잘 갈렸는지 확인했다.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수건을 목에 감고, 밤새 얼린 냉수를 챙기고, 소주 몇 병 챙겨서 산소로 간다. 남자들의 어깨에 가볍게 걸친 예취기가 단숨에 웃자란 풀을 잘라낸다. 보조 일꾼들은 기다란 갈구리를 들고, 예취기 날에 잘려 나온 풀을 한쪽으로 싹싹 긁어 모은다. 아직 여름해가 남아 있어 예취기로 작업하는 사람이나 갈구리로 풀을 긁는 사람이나 땀이 샘솟기는 마찬가지다. 
 
 함께 나온 엄마의 한숨소리, "아이고, 이 지심 봐라. 지심 크는 거 맨키로 돈이 생기몬 부자 안 될 사람 아무도 없으끼다." "엄마, 이게 돈이라쿠몬 서로 뜯어갈라고 난리법석에 싸움나고, 풀이 없어가 산사태 날걸?" 
 
 벌초는 외지로 나간 사람들에게는 도시의 치열함을 매일 감당하고 있으니 참석하지 못해도 아량을 베푸는 시간이고, 고향에 살면서 참석하지 못하면 산소까지 몇 발이나 된다고 못 오느냐는 원망을 받는 시간이기도 했다. 우리엄마가 늘 하던 말, "명절 이거 누가 만들어났네. 살아있는 조상부터 잘 챙기라이~"
 
 내 생애의 기억이 나는 추석은 늘 풍성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한가위만 같아라`라는 말이 딱 들어맞는 추석명절이 아니었나 싶다. 추석이 성큼성큼 큰걸음으로 다가오는 동안 들판의 곡식은 알알이 단단히 잘 여물었다. 묵전이 별로 없었을 당시에는 황금들판을 바라만 봐도 든든했다. 
 
 추석이 다가오는 대목장에는 마을마다 정차한 버스가 사람을 그득 태우고 들어와 읍사거리나 터미널에 사람들을 선물처럼 쏟아냈다. 엄마들은 파랑색 플라스틱 장바구니를 하나씩 들고 시장보다 미용실부터 먼저 들러 가장 오래가는 파마를 위해 구루프를 말고 형형색색의 보자기를 뒤집어 쓰고 시장을 활보했다. 장바구니가 넘치도록 장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에는 생선 비린내와 파마약 냄새가 뒤섞였다.
 
 "오데서 했는고, 빠마가 참 잘 나왔네." "성님은 올매 주고 했심미까. 머리를 좀 더 쳐주라쿠낀데." "아이고 이 사람아 딱 좋네. 각시 시절매이로 참 이삐게 됐네." 똑같이 빠글빠글 뽀글이 고동머리를 하고서도 서로의 머리카락을 매만지며 은근한 칭찬을 보냈다. 앉아있는 뒷모습으로는 엄마를 찾으라면 절대 구분을 못할 그런 웃음부터 나오는 풍경들이었다.


 집안의 경제권을 쥐고 있던 아버지들도 이유 불문하고 지갑을 팍팍 열어 뭉칫돈을 꺼내 엄마에게 주고, 아이들의 추석빔을 준비했다. 시골장의 신발전 앞에서 아이의 발에 새신을 신기고 앞꿈치를 눌러 약간 큰 신발을 신게 했다. 추석에 산 신발은 다음해 설날빔을 살 때까지 적당히 닳고, 발은 자라 꼭 맞게 되는 것이 몇 해씩 되풀이되었다. 
 
 추석 언저리가 가까워지면 이발을 하고, 김이 뿌옇게 서린 목욕탕을 찾았다. 묵은때 속에 숨겨져있던 외모가 세상에 선보이는 빛나는 순간들이다. 통학버스에서도 유난히 예쁨과 멋짐의 모습들이 나올 때가 명절 무렵이 아니었나 한다. (난 사실 통학버스를 타고 다녀본 적은 없지만···)
 
 추석 무렵이나 추석이 지나면 인적이 드물었던 남해의 뜰은 다시 바빠지기 시작한다. 밭에는 밭마늘을 심고, 씨앗 파종과 모종을 사서 심고, 논에는 여름내 익어가던 벼를 추수한다. 평소 품앗이로 농사일을 하던 부모님들도 오랜만에 모인 자녀들과 도란도란 농사를 짓는다. 올 추석은 햅쌀로 만든 밥을 먹을 수 있을까? 2021년 추석은 세상사람 모두가 코로나에서 안전하게, 가족들과 행복하게, 가을처럼 풍성하게, 깎아놓은 밤톨처럼 동글동글 잘 보내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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