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메기 커튼이 드리울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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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메기 커튼이 드리울 때
  • 남해타임즈
  • 승인 2021.12.17 16:55
  • 호수 77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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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경의 남해일기
창선면 당저마을에서 물메기를 말리는 모습이다. 〈사진제공: 김대성 남해군축구협회 홍보위원장〉
창선면 당저마을에서 물메기를 말리는 모습이다. 〈사진제공: 김대성 남해군축구협회 홍보위원장〉

 남해읍에서 미조항으로 가는 길은 멀지만, 지루하지 않은 길이다. 미조에서 해야 할 일을 한번 더 기억하다보면 햇볕을 받아 반짝이는 앵강만이 훤한 원천을 지나게 된다. 울창한 숲이 매력적이고, 수많은 사람들에게 면허 하나씩 손에 넣게 했던 자동차운전학원을 지나, 한때는 손님이 찾아오면 모시고 가던 횟집들이 줄지어 있다. 오른쪽으로는 계단식 논이 보물처럼 쌓인 가천마을도 보이고, 손을 내밀면 닿을 듯한 노섬도 가까이 있다. 이성계가 백일기도 후 조선을 건국했다는 전설이 있는 보리암이 있는 금산은 스쳐지나가는 나에게도 좋은 기운을 받는 듯 장엄한 느낌이 들게 한다. 동료들과 상주쯤에서 이런 이야기를 나눈다.
 "한참 온거 같고만, 인자 상주네. 오늘은 백사장이 더 반짝이는 거 같다야."
 "미조가 좀 멀기는 해도 업무만 아니면 여행하는 기분도 들고 좋은데요."
 "다른때보다 오늘은 풍광이 더 좋다. 그쟈?"
 "오늘은 일찍부터 움직여서 밥맛도 좋을 것 같습니다."
 
 미조항은 점심무렵의 식당에도 새벽처럼 싱싱함이 넘친다. 뚝딱뚝딱 빠른 손놀림으로 금새 만들어 낸 음식들이 하나둘 식탁위로 오른다. 겨울바다에서 잡은 생멸치조림은 과히 예술에 가깝고, 어른 팔뚝만한 갈치구이는 호사스런 대접이다. 어느 푸드스타일리스트가 이 멋과 맛을 낼 수 있겠는가. 남해의 맛을 감탄할 무렵, 노란색을 입힌 정체불명의 전유어가 올랐다. 
 "이거는 뭐임미까."
 "요거 물메기전이라예."
 "물메기예? 이 귀한 걸 전으로예?"
 "비쌀 때 묵으몬 한맛 더 있어예. 따실 때 어여 잡사보시다."
 우리는 요란스런 젓가락 소리를 내며, 요새 물메기가 안잡혀 귀하다는 둥, 겨울에는 역시 물메기탕이 최고라는 둥 서로 남해의 겨울별미를 추켜세우며 맛있는 소리를 냈다.
 요즘시대에는 식자재마트에서 식료품을 구매하는 일이 흔하지만, 대형마트 하나 없었던 시절에는 장바구니를 들고 나가 난전에서 생선이나 채소를 사고, 하나로마트의 시초격인 연쇄점에서 샴푸나 빨래비누, 밀가루, 퐁퐁 같은 공산품을 구매했다. 엄마가 시장에 다녀온 흔적에 따라 밥상은 그때 그때 달랐다. 엄마의 손가락끝에서 나오는 MSG와 차돌도 소화시킬 우리의 입맛은 5대 영양소를 골고루 갖춘 식단보다 더 맛있는 밥상이었다.
 겨울방학을 앞둔 12월. 그때도 엄마는 시장을 다녀와서 집 한켠에 마련된 수돗가에서 물메기를 만들고 있었다. 미끈한 물메기를 한손으로 꽉 잡고, 한손으론 칼로 비늘을 긁어냈다. 나는 가방을 벗어 던지고, 마루에 앉아 다리를 깐닥거리며 엄마의 행동 하나하나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엄마, 손 안 시린가."
 "물도 안얼었는데 뭐이."
 "그래도 물이 찹으낀데, 엄마는 암시랑토 안코로 물에 손을 넣어서 신기하다고."
 "다 너그들 믹일라고 안그러나. 추버도 떠버도 다 참을 수 있는기 엄마다. 오데 맨걸로 되는줄 아나."
 "엄마, 근데 메기는 우찌 맹글라고. 내는 물컹해서 싫던데."
 "쪼깨 있어봐라. 엄마가 새로운 거 맛을 보이주께."
 
 열심히 손질한 물메기를 빨래 장대에 거니 핏물은 똑똑 떨어지고, 바람에 조금씩 말라갔다. 몇시간동안 물기를 걷어내어 살이 차고 단단해진 물메기를 엄마는 다시 재단하느라 손이 빨라졌다. 껍질을 벗겨내고, 포를 떠 접시에 담고, 오래된 막걸리식초로 담근 초장으로 물메기회를 내놓았다. 망설이는 나에게 물메기의 쫄깃한 식감과 뜨거운 김을 불어 가며 입천장이 까지도록 먹는 물메기탕의 진미를 알게 해 준 시간이었다. 다른 형제들보다 나는 엄마랑 음식궁합이 잘 맞다.
 
 겨울방학이 시작되면 남동생들은 무논이 얼기를 기다렸다가 썰매를 지치고 놀았다. 얼어서 볼이나 손이 발갛게 되어도 타오르는 열정으로 얼음을 녹이는 시간이었다. 어쩌다가 살얼음 근처로 가 발이 빠지면 동생을 걱정하기는 커녕
 "정완이 오늘 물메기 잡았다."라며 놀리기가 먼저였다. 누구라도 그런 사단이 나야 집으로 돌아가는 우스운 어린 시절이었다.
 
 못생긴 사람을 놀린다며 메기나 아구로 부르던 시절이 지나고, 비싼 몸값을 받는 메기들이 어시장에서 인기를 누리면 겨울이 시작되었다는 증거다. 덕장에서 커튼처럼 드리우고 갯바람에 얼었다 녹았다를 반복하는 건조메기는 된장만 발라 쪄도 고급 요리가 되고, 바싹 마른 메기를 겻불에 구워내는 것은 창시자가 누구인지 칭찬받을 맛이다. 송년회에서 즐긴 회포는 겨울무를 삐져넣은 물메기탕으로 달랬다.  올해가 가기 전에 귀한 물메기탕 한뚝배기 하실래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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