따뜻한 남쪽마을 김장축제
상태바
따뜻한 남쪽마을 김장축제
  • 남해타임즈
  • 승인 2021.12.27 11:03
  • 호수 775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김연경의 남해일기

해마다 겨울이 다가오면 집집마다 겨우내 먹을 김장준비를 했다. 수도권을 비롯한 도시지역에서는 한겨울 바람이 불기도 전에 김장을 끝내고, 겨울 풍광을 여유롭게 즐겼다. 엄마는 크리스마스 이브가 되기 전까지 사람이 들어가도 될만한 빨간 고무통을 마당에 내어 수돗물을 담고 계란이 둥둥 뜰때까지 소금물을 녹였다. 중학교 가정시간에 소금물의 농도를 맞추는 방법이란걸 알고 놀란 적이 있었다. 밭에서 직접 기른 배추를 뽑고 리어카에 실고 와 밥통만한 배추를 노란속이 보이도록 잘라서 소금물에 절이고, 뒤집고, 깨끗하게 씻어서 큰 채반에 받쳐 물기를 제대로 뺐다. 김장에 치댈 양념은 오랫동안 삭혀서 단맛이 나는 젓국과 여러 가지 재료를 넣고 푹 고아낸 육수에 햇볕을 골고루 받아 잘 마른 고춧가루를 준비했다. 크리스마스에는 우리집만의 김장축제가 열렸다. 김장을 하는 일은 아이를 키워내는 것처럼 고된 일이지만, 끝내고 나면 곳간에 담긴 넘치는 곡식만큼이나 안심이 되었다. 김장이 주는 겨울의 안도감을 나도 잘 알고 있지만, 김장을 제대로 도와드린 적이 없다. 아홉시만 되면 소등되는 시골에 사는 나는 외부도시의 화려한 네온싸인과 심장을 쿵쾅거리는 스피커가 그립기도 했다. 특히, 캐럴송이 만천하에 울려 퍼지는 겨울이 되면 더 그렇다.
"올해도 크리스마스에 김장허끼다. 오데 가지말고 엄마가 치대몬 통에 좀 갖다 넣고, 양념 모지래몬 좀 아사주고로 해라."
"엄마, 올해 김장도 놉을 얻어 해야 되겠는데? 친구들하고 약속 있는데. 엄마, 서울사람들은 김장을 11월에도 해서 일찌감치 하더마는, 우리도 좀 일찍 하면 안되능가?"
"해마다 장~ 크리스마스에 하는 걸 암시로. 객지사람들은 추위가 오기전에 한다캐도 시금치랑 배추는 된서리를 맞았다 녹았다, 겨울바람을 맞았다 녹았다 해야 달달한 맛이 나는기라."
"그 맛이 아무리 좋다해도 크리스마스에는 도시바람도 좀 맞고, 친구들 좀 만내고 오끼네."
"은냐. 동서남북 쏘댕기는 니 손 바래서 되긋나. 젊을 때 많이 댕기야제."

해마다 김장철이면 엄마의 나레이션과 함께 김장준비가 시작된다. 직접 하지는 않더라도 일을 봐주는 사람을 부리고 살더라도 할 줄 알아야 된다는 게 엄마의 지론이다. 배추는 속이 알차야 되니 단단하고 무거운 것을 고르고, 배추의 겉에 붙은 초록잎들은 따로 떼어냈다가 한겨울에 시래기국 재료가 된다. 한겨울의 된서리를 맞으며 낚아온 갈치나 볼락은 한 마리도 허투루 쓰지 않고, 차곡차곡 모아 젓국을 만들었다. 무엇보다 배추를 절이거나 젓국을 만들 때 쓰이는 굵은 소금은 미리 사다가 몇 년을 간수를 빼서 한 움큼 잡아도 손바닥에 붙은 것 없이 바스락 거리며 솔솔 흘러 내렸다. 엄마는 굵은소금을 `산소금`이라 불렀다. (生소금, 山소금, 買소금인지는 모르겠지만...) 한여름 태풍에 떠 밀려 온 청각은 쩍만 떼어내고 소금기 가득한 상태로 그늘에서 말렸다가 김장철에는 깨끗이 씻어 쫑쫑 썰어넣으면 시원한 감칠맛이 돌았다.
나는 김장에 손을 보태지 못하니 엄마를 김장지옥에서 탈출시켜야 한다는 일념하나로 절임배추 구매나 김장김치를 사먹는 것을 제안했다. 그때마다 엄마는 단호한 목소리로 그때 그시절 이야기를 하셨다.
"엄마, 요새 사묵는 김치도 일반 배추김치, 백김치, 총각김치에 여러종류를 입맛대로 사묵을수 있다 캐도 꼭 그리 고생을 사서 허능고."
"너그매는 사묵을 팔짜는 못된다. 요새처럼 따신 집에서 배치 치대는 이거는 암긋도 아이라. 옛날에는 소금도 귀해서 선소 갱번까지 내려가서 갱물에 배추를 절였다 아이가. 요새는 갖추갖추 속을 챙겨넣어도 맛이 있니 없니 하제. 그때는 젓국만 넣어도 맛만 좋았니라.""

결혼을 하고 난 이후에는 내 아이들에게 삶의 체험현장인 김장체험을 시키고자 친정으로 갔다. 조막만한 고사리손에 맞지도 않는 장갑을 끼고 앉아 큰 대야를 앞에 두고 고춧가루 범벅을 배추보다 옷에 더 묻히고, 소금에 절인 배추를 뜯어먹고 물을 찾는 아이들. 나는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추억하기 위해 사진 찍느라 바쁘고, 엄마는 딸과 손주들의 뒤치다꺼리로 더 바빴다. 어른들보다 더 하려고 드는 손주들의 고집스런 모습이 점점 악동으로 변해갈 때 할머니의 인내심도 한계에 다다른다.
"옷에 고치까리 물 들몬 지아지도 안헌다. 저긋들 빨래는 우찌 허낀고 모리긋다. 아~아들 데꼬 집에 올라가라. 니는 애들 챙기서 집에 가는기 도와주는기다."
"엄마, 애들이 체험도 하고 좋지. 언제 김장담그는 걸 해보긋어."
"손주들이 찾아오모 즐겁고, 간다쿠몬 더 좋다쿠더마는 그 말을 누가 먼저 했는고 내가 딱 그 심정을 알긋다. 어여 너그 짐 갱기서 가라."
"엄마, 아까 올려놓은 돼지수육 맛은 언제 보고?"
"지금 수육이 문제가 아이다. 김장 끝나몬 부르낀께 올라가라."
반강제로 친정에서, 외가에서, 처가에서 쫓겨난 우리는 생각지도 못한 조퇴에 늘어지게 한숨을 자고 오후시간을 보냈다.

엄마손 없이도 휴일을 보낼 수 있게 된 아이들을 떼놓고 친정으로 간다. 알이 꽉찬 배추를 쪼갤 팔힘이 약해진 엄마는 큰사위가 쪼갠 배추로 간을 절이고, 작은사위가 잡아온 뽈래기로 김장속을 만든다. 큰딸이 만들어낸 돼지수육과 작은딸이 따르는 막걸리 한잔으로 김장의 피로를 푼다. 빨간 양념을 고루고루 묻힌 김장김치는 가까운 이웃집에도 한쪽씩 정을 나눈다. 자원봉사단체에서 직접 농사지어 생산한 배추로 만든 김장은 마을마다 골고루 소외된 가정으로 배달되고 있다. 훈훈한 열기로 겨울 추위를 녹이는 고마운 분들 덕에 따뜻한 남쪽마을의 김장축제는 크리스마스 선물처럼 반갑고도 기다려진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