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범한 행복 비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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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범한 행복 비결
  • 남해타임즈
  • 승인 2022.01.07 10:45
  • 호수 77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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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숙 | 본지 칼럼니스트
이 현 숙본지 칼럼니스트
이 현 숙
본지 칼럼니스트

 대선이 확정된 2022년 새해가 밝았다. 이변이 없는 한, 금년에도 지구촌 최대의 과제는 바이러스와의 전면전이 될 듯하다. 코로나 신종 바이러스가 처음 창궐한 이후 지금까지 기세가 좀처럼 수그러들지 않아 심히 우려스럽다. 오미크론을 끝으로 더 이상의 변이 바이러스가 출몰하지 않기를 바랄 뿐이다. 


 인류 공동체의 삶이건 일개인의 삶이건 문제적 상황은 시시각각 엄습한다. 그중에는 사전 예측이나 원인 규명은 물론 실체 파악조차 어려운 경우가 적지 않다. 사실 무방비 상태에서 이 같은 상황이 발생하면 누구라도 속수무책으로 당할 수밖에 없다. 한 마디로 대책이 없다. 인생은 종종 고해(苦海)에 비유된다. 그만큼 삶의 시간 속에는 출구가 보이지 않는 터널에 갇힌 것 같은 아뜩한 순간들이 허다하다. 하기는 순풍에 돛 단 듯 순탄한 날만 있다면 그것은 진짜 삶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런데 삶이 끝날 때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그러므로 비관적인 상황에 처했다 해서 시름에 빠진 채 한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다. 이런 때일수록 사고의 전환이 필요하다. 생각을 바꾸면 삶이 달라진다. 행불행이란 것도 결국 마음먹기에 달렸다. 행복해서 웃는 게 아니라 웃어서 행복하다지 않는가. 


 능히 알지만 실천은 굼뜬, 소박한 행복의 비결에 대해 이야기해 보고자 한다. 그것은 바로 `감사`다. 감사할 만한 일에 감사하는 건 누구나 할 수 있다. 하지만 감사할 일이 전혀 아님에도 감사하는 건 결코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그래도 걸음마를 배우고 말을 배우고 젓가락질을 배우듯 감사하는 법을 꾸준히 연습하다 보면 어떤 상황에서든 감사할 수 있는 지혜와 여유를 터득하게 될 것이다. 

 부모나 국가를 자의적으로 선택하여 태어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이 점에 비춰볼 때 식수 한 동이를 얻기 위해 뜨거운 태양 아래 몇 킬로를 오가야 하는 나라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 종교의 자유나 언론의 자유 등 기본적 인권마저 보장 받지 못하는 나라에서 태어나지 않은 것만으로도 다행하고 감사한 일이다. 


 행복의 또 다른 비결은 `지족(知足)`이다. 자기 자신을 진정 행복한 존재로 만드는 것은 자신의 마음이다. 그것도 만족함을 아는 마음이다. 행복은 내용(내적 마음 상태)에 있되 형식(외부 조건)에 있지 않다. 흔히 남의 떡이 커 보이고 남의 짐이 가벼워 보이지만 남이 보기에만 그럴 뿐이다. 실제로는 저마다 자기가 짊어진 짐이 세상에서 가장 무겁다고 느낀다. 게다가 어딘가에 행복의 지름길이 있을 거라 생각한다면 착각이다. 지름길은 없다. 도로 가든 모로 가든 바른 마음을 가지고 바른 길을 가는 것에 만족할 일이다.


 행복의 마지막 비결은 `희망`이다. 미래는 불투명하고 사람의 운명은 불가지(不可知)여서 언제 쪽박을 찰지 대박을 터뜨릴지 알 수 없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게 아니다. 희망이 있는 한, 무너진 삶을 다시 일으켜 세울 수 있고 지나간 과오나 실패를 거울삼아 앞으로 나아갈 수 있음을 잊어서는 안 된다. 사람은 절망에 죽고 희망에 산다. 헛된 희망일지언정 희망 고문일지언정 내일에 대한 희망으로 오늘의 절망을 극복해 나간다. 

 인류의 미래에 관해 회의적인 시각들이 많다. 그러나 인류의 집단 지성은 문제적 상황에 대한 해결책 그리고 공존과 번영을 위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할 것으로 기대한다. 외계 행성 탐사만 하더라도 미지의 세계에 대한 동경에서 비롯되었지만, 도전 그 자체만으로 인류에게 희망을 선사하는 측면이 있다. 빌게이츠는 화성에 가는 것보다 지구상의 인류를 위해 헌신하는 편이 낫다며 우주를 향한 일론 머스크의 열정을 우회적으로 비판했다. 여하튼 두 사람 모두 희망의 아이콘으로서 시대적 요구에 부응하고 있다고 본다.


 상처에서 새살이 돋는다. 새벽이 찾아오지 않는 밤은 없고 도무지 끝날 것 같지 않던 시련도 그 끝은 있다. 삶이 버거워도 이런 반전의 묘미가 있어 그런 대로 견딜 만하다. 누구나 일생에 단 한 번 영접하는 2022년, 얼굴만이 아니라 허파까지 활짝 웃을 수 있는 날들이 많았으면 하는 바람이다.
 
 분란은 잦은데 넓은 집에만 산다고 행복한 것은 아니다. 금슬 좋은 부부는 좁은 침대도 넓게 느껴진다. 그렇지 않은 부부에게는 고대광실도 좁고 답답하다. 


 잘 먹고 잘 살라는 말은 악담이 아닌 덕담이다. 살기 위해서는 먹어야 하고 먹기 위해서도 살아야 한다. 그런데 몸과 마음 어딘가에 고장이 나면 음식을 먹을 수 없다. 물 한 모금도 삼키기 어려운 상황도 올 수 있다. 먹고 자고 배설하는 것만큼 중요한 게 없다. 


 흔히 입에 달고 사는 말 중에 죽겠다는 말이 있다. 역설적으로 이 말은 삶에의 강한 의지를 표명한 말이다. 죽고 싶다는 말이 아니다. 그 말을 곧이곧대로 들으면 안 된다. 잘 살고 싶은데 잘 살아야겠는데 힘들다는 말이다. 누군가 옆에서 죽고 싶다고 말하면 얼마나 사는 게 힘들면 저런 말을 할까 라고 받아들여야 한다. 사즉생 생즉사 갑질하고 갑질당하는 사회 구조는 반드시 개선해야 한다. 서로를 존중하고 배려하는 문화가 정착되도록 다함께 노력해야 한다. 공정과 정의까지는 차마 바라지 못하고 어느 누구의 삶을 감히 하찮다 말할 수 있을 것인가. 온 우주에 귀하지 않은 존재는 단 하나도 없다. 인간은 홀로 존재할 수 없다. 사람에게만 고마운 것이 아니다. 논에서 자라는 벼 한 포기에도 한 줌의 공기에도 바람과 비와 별빛에도 고마워해야 하거늘 사람에게야 더 말할 게 어디 있나. 서로에 대한 고마움과 미안함과 서로를 배려하고 존중하는 마음이면 우리의 삶이 얼마나 훈훈해질까. 


 내가 하기 싫은 일은 남에게 강요해서도 안 된다. 자산가에게 부유세를 많이 내라고 강압적으로 징수하거나 강요할 게 아니라 본인 스스로 내고 싶은 마음이 들도록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해야 한다. 선행을 하면 그것이 아주 작은 것이라도 칭찬하는 풍조가 마련되면 기꺼이 선행을 하는 사람들이 늘어날 것이다.사람을 귀하게 여기는 한해가 되기를 이는 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삶에서 벌어지는 일 
 
 일반인들이 선망하는 직업군에 속한 이들이 모두 모범적인 삶을 살아내지 못하고 있음은 안타까운 일이다.
 
 삶을 사랑하고 죽음을 생각하라! 때가 오면 자랑스럽게 물러나라. 한 번은 살아야 한다. 그것이 제1의 계율이고, 한 번만 살 수 있다. 그것이 제2의 계율이다. 


 - 에리히 케스트너 `두 가지 계율`
 `꿩 먹고 알 먹고, 도랑 치고 가재 잡고, 누이 좋고 매부 좋고, 마당 쓸고 돈 줍고, 일석이조, 일거양득`의 기회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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