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수의 미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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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수의 미학
  • 남해타임즈
  • 승인 2022.01.14 09:23
  • 호수 77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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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현숙 | 본지 칼럼니스트
이 현 숙본지 칼럼니스트
이 현 숙
본지 칼럼니스트

 역설적으로 말해 인간이란 존재는 실수하기 위해 태어난 듯하다. 즉 실수하니까 인간이다. 하기는 완전자인 조물주도 실수를 범하시는데 인간이야 말해 뭣하랴. 조물주의 실수는 다름 아닌 실수투성이 인간을 창조하신 것이다.


 `불가항력적으로, 피치 못해, 고의적으로, 습관적으로, 무심코, 어쩌다` 등 실수에는 여러 경우의 수가 있다. 실수의 파장은 때로 엄청나다. 5·18 당시 신군부는 시민 강제 진압과 민간인 학살 의혹이 제기되자 `자위권 발동`이었노라 정당성을 주장했다. 그런데 주장의 진위 여부는 차치하더라도 반성과 사과가 결여된 태도만큼은 중차대한 실수임에 이론의 여지가 없다. 단순히 역사적 사건으로만 치부하기에는 너무 처절했던 현대사의 한 단면을 통해 우리는 과연 어떤 교훈을 얻었는지 궁금하다. 


 무심결에 내뱉은 말실수로 누군가에 치명적인 손상을 입히기도 한다. 엄마들이 이따금 농반진반 늘어놓는 푸념이 있다. "네 아빠 만나 널 낳은 게 내 인생 최대 실수야." 액면 그대로 그녀의 인생 스토리가 실수로 점철되었다 치자. 하지만 그녀의 진짜 실수는 어쩌면 자신이 던진 예리한 말의 칼날에 베인 자녀의 상처를 간과한 데 있는지도 모른다. 주부들이 곰국을 끓이다 냄비를 태우는 실수는 실수도 아니다.


 사건 용의자가 범죄 현장에 남긴 실수가 사건 해결의 실마리가 되어 진범이 검거되는 경우는 불행 중 다행한 일이다. 실수 덕분에 목숨을 구한 해외 사례도 있다. 공항에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비행기에 오르지 못한 어느 승객은 잠시 후 눈앞의 상황에 모골이 송연해졌다. 자신이 예약한 그 여객기가 이륙 직후 추락하여 탑승객 전원이 사망한 것이다. 


 실수를 하지 않으면 좋겠지만 실수는 불가피하다. 한 치의 실수도 없는 인간은 없으며 불완전한 인간에게 무결점을 요구하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그나마 실수를 만회하는 길은 통렬한 반성, 진심 어린 사과, 책임 이행이다. 따라서 실수를 인지한 즉시 변명과 회피로 대응하기보다 사실을 인정하고 반성하고 사과하는 것이 최선이다. 그것도 상대방의 가슴속에 쌓인 응어리가 풀어지고 마음 문이 열릴 때까지 거듭 사과해야 한다. 


 실수하고도 바로잡지 않으면 그게 더 큰 실수다. 모든 실수가 죄는 아닐지라도 용서받지 못한 실수는 죄가 될 수도 있다. 희랍어인 `메타노이아(Μετάνοια)’는 `도덕적 회심`을 뜻한다. 끊임없는 성찰과 수행을 통해 자신의 나약성과 불완전성을 받아들이고 실수나 죄를 참회할 때 비로소 도덕적 인간으로 거듭나게 된다. 종교가 부활과 구원에 앞서 회개를 강조하는 것도 같은 맥락일 것이다. 


 자신의 실수에는 관대하고 타인의 실수에는 엄격한 이중적 잣대가 빈번하게 통용되는 세상이다. 이른바 `내로남불`이다. `어찌하여 형제의 눈 속에 있는 티는 보면서 네 눈 속에 있는 들보는 깨닫지 못하느냐(누가 6:41)`는 성서 구절은 단편적이나마 인간이 얼마나 좀스럽고 허점투성이인지를 일깨워 준다.


 각설하고, 우리 `남해시대`가 지난주에 발행한 신년 첫 호에 `평범한 행복 비결`이라는 제하의 졸고가 게재되었다. 그런데 신문을 펼쳐 든 순간 중대한 하자가 발생했음을 직감하고 가슴이 더럭했다. 다름이 아니라 원고를 송고하는 과정에서 해당 글의 완성본 밑에 주저리주저리 달린 습작을 미처 발견하지 못함으로써 명명백백한 실수가 비롯되었다. 


 강산이 몇 번 바뀌도록 이어온 글쓰기 인생에서 스스로 오점을 남긴 첫 실수가 되고 말았다. 더욱이 집필자 이전에 한 사람의 독자로서 많은 애정을 가진 신문의 명예를 실추시킨 죄, 글의 완성도를 떨어뜨려 귀한 지면을 허투루 낭비한 죄, 무엇보다 새해 벽두부터 독자님들께 희한하고 볼썽사나운 문장으로 글맛을 손상시킨 죄를 생각하면 괴롭다. 허공에 흩어진 말이면 어깃장이라도 부려 보겠지만 활자화된 글이니 오리발을 내밀 수도 없고.  


 그런데 이 와중에 칠흑의 어둠 속에서 떨리듯 빛나는 한 줄기 촛불과 같은, 아름다운 숫자가 눈에 들어왔다. 묘하게도 문제의 글이 실린 신문의 지령(紙齡 신문의 나이)은 행운의 숫자 7이 3번이나 중첩된 `777호`였던 것이다. 부지불식간에 다가온 행운이란 바로 신문이 건네준 무언의 위로였으니, 이제야 비로소 실수의 미학을 노래할 마음의 여유를 되찾았다. 


 마지막으로 추호도 고의적인 실수는 아니었기에 독자 여러분께서 널리 혜량하여 주시리라 믿으며 거듭 사과의 말씀을 올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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