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사동(門師洞)
상태바
문사동(門師洞)
  • 남해타임즈
  • 승인 2022.02.04 11:54
  • 호수 78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나의 고향, 나의 삶 123
碧松 감충효 | 시인 / 칼럼니스트
碧松 감 충 효 시인 / 칼럼니스트
碧松 감 충 효
시인 / 칼럼니스트

문사동 산행에서 역사 한 줄 읽어 본다   
정암의 도학정치 개혁의 선봉에서
자암도 힘을 쏟다가 남해도로 귀양길.  

 
 도봉산 계곡 초입 왼쪽 큰 바위에 한자로 `道峯洞門(도봉동문)`이란 유명한 글씨가 새겨져 있다. 우암 송시열 선생의 친필이다.


 이 `道峯洞門`을 지나 200여 미터 올라가면 우측에 도봉서원이 있어 정암 조광조 선생과 우암 송시열 선생의 위패가 모셔져 있거니와 이 도봉동 계곡에는 이 두 분을 기린 당대의 명필들이 유명한 글씨들을 많이 남겨 놓았다.


 이날의 최종 목적지는 문사동(門師洞)이다. 지하철 도봉산역에 하차하여 목적지로 직행하였다. 도봉계곡을 한참 올라가서 우이암 못 미쳐 계곡 큰 바위에 새겨진 글씨가 바로 `門師洞` 다. 왜 이런 글씨가 이 깊은 계곡 큰 바위에 새겨져 있는지 아는 분이 그리 많지 않은 것 같다. 정암 조광조 선생이 급변하던 조정의 피바람과 각종 사화와 정변을 피해 이곳 도봉산 계곡에 숨어 들어온 뒤로 세상에 나오지 않음에 그의 제자들이 수소문하여 스승을 찾아 헤매다가 이 곳 도봉 깊은 계곡에서 스승을 찾아 가르침을 받았다고 한다. 그리고 그의 제자들이 스승을 찾은 이 곳 바위에 `問師洞`을 새겼다고 전한다. 즉 "스승에게 물어보는 곳"이란  뜻이다. 혹자는 "스승을 찾아 헤맨 곳"이라고도 한다. 


 조광조 선생의 발자취를 둘러보다가 우리 고향 남해로 유배를 온 자암(自庵) 김구(金絿)(1488~1534) 선생을 떠올려 본다. 조선 중종 때의 명신이자 서예가로 조광조 등과 함께 도학 정치를 통한 개혁에 앞장서면서 1519년(중종 14) 32세의 나이에 홍문관 부제학에 올랐으나 그해 남곤, 심정 등의 훈구파 세력이 일으킨 기묘사화로 인해 개혁파 조광조와 연루된 김구는 개령(開寧:경북 김천)으로 유배되었다가 수개월 후 죄목이 추가되어 적소 남해 노량으로 이배되어 오게 된다. 그의 저서 『자암집』에는 남해찬가로 일컬어지는 경기체가 화전별곡과 함께 남해에서 유배 생활의 시름을 잊고자 지은 60여 수의 시문이 수록되어 있다. 


 잠시 역사의 한 줄기를 생각하다가 문사동(門師洞)을 뒤로 하고 하산을 서두른다. 하산길 오른 쪽 계곡의 물에 잠긴 큰 바위에는 김수증 선생이 정암 조광조 선생의 학덕을 우러러 사모한다는 뜻의 `(고산앙지)高山仰止`라는 글씨가 새겨져 있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