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굴의 호국정신이 살아있는 문화재길을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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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굴의 호국정신이 살아있는 문화재길을 걷다
  • 남해타임즈
  • 승인 2022.02.11 10:13
  • 호수 78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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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부경의 남해바래길 이야기 │ 14코스 이순신호국길 2
고현면행정복지센터
고현면행정복지센터
리더십체험관 관음루
리더십체험관 관음루
대장경공원
대장경공원
정지 장군의 관음포대첩비
정지 장군의 관음포대첩비
정지석탑
정지석탑

 경운기와 차량통행이 빈번하여 번잡하므로 안전에 유의하면서 고현면행정복지센터 앞 왼쪽 인도를 걸어간다. 고현면은 24개 마을에 인구는 3496명이며 총 면적 28.98㎢다. 신라 신문왕 전야산군 군내면으로 출발한 고현면은 이충무공 전몰유허지와 산닥나무 자생지의 국가지정문화재, 정지석탑과 화방사 채진루 등 도지정 문화재자료가 있으며 성산패총과 성산석성, 성산고분군 등 문화재가 즐비한 옛날 남해의 현청이 있던 곳이다. 


 여기를 지나서 250m쯤 탑동(중앙동)마을 중심까지 바래길 리본을 따라가다 보면 자연석 위에 턱 세워진 탑을 만난다. 탑의 유래를 기록한 입비를 살펴보니 "지금으로부터 1290년 전 신라 문무왕 5년 전야산군(남해군의 고현) 당시 녹두산 남록에 서당골이 있었으며 현 고현초등학교 뒷산 종지등에 종각이 있었다. 그 후 신라 제33대 경덕왕 때 승전법사가 와서 망덕사란 절을 창건함과 동시에 이 자리에 탑을 세우고 그때 이 탑은 망덕사의 입구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후 약 3백년간 존재하다가 망덕사는 화재로 인하여 없어지고 현 탑만 현재까지 보존되어 있으며 본 동명을 탑동이라고 부르게 되었다고 한다. 

이순신 장군 유언비
이순신 장군 유언비

 

 또 다른 이야기는 정지석탑이라고 부르는데 고려 우왕 9년(1383) 정지(鄭地) 장군이 관음포에서 왜구를 격파하여 전쟁에 승리한 것을 기념하기 위해 만든 탑으로, 남해지역 주민들이 손수 돌을 깎고 다듬은 것이다. 큼직한 자연바위를 받침 삼아 그 위에 탑신(塔身)을 올렸다. 탑신은 사각형 4개, 조그만 원형 1개의 몸돌과 지붕돌 5개로 번갈아 층층이 쌓아 올렸다. 소박한 모습의 탑으로, 왜구로부터 남해지방과 백성들을 구한 애국정신이 고스란히 담겨 있어 엄숙한 분위기를 느끼게 한다. 


 탑을 뒤로 하고 좌로 돌아 옛날에는 바다였고 지금은 간척되어 농경지로 조성된 둑방길로 달려 나간다. 봄이면 각종 꽃들이 만발하여 상춘객들이 즐거이 찾는 둑방길 봄꽃축제장 쉼터에서 우로 돌아 간척지 수문까지 1㎞가량을 뚜벅뚜벅 걸어 들판 가운데로 나간다. 여기 일대가 관음포만이다. 이순신 장군이 일본군을 물리치고 장렬히 전사한 관음포 그날의 함성과 조선수군들의 백절불굴의 의지가 휘몰아치는 순국공원 10.5㎞를 왔다. 


 잠시 화장실에 가서 해우를 정리하고 쉼터에 앉아 간식을 먹으며 역사의 현장을 둘러본다. 지금 여기 머물고 있는 곳이 그 유명한 1598년11월19일 아침 이순신 장군이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의 관음포만에서 순국한 이충무공 전몰유적지이다. 바래길을 기준하여 가는 길 앞쪽으로는 이순신 영상관과 호국광장이 있으며 오른쪽 뒤편에는 팔만대장경 판각지와 정지 장군의 관음포대첩, 그리고 이순신 주변 인물들로 조성된 인물공원, 그리고 이순신의 리더십체험관이 있는 관음포 광장이 위치하고 있다.  


 남해군에서는 2017년 4월 28일 임진왜란 마지막 전투 노량해전에서 순국한 이순신 장군과 함께 여러 장수들과 조·명 수군 장병들의 넋을 기리기 위해 이순신 순국공원을 7년간 공사 끝에 건립하였다. 남해 관음포는 이순신 장군의 호국정신이 오롯이 남아있는 순국지이며 순국공원에는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목숨을 바친 영령들의 한이 배어 있는 곳이기도 하다.  


 출입계단을 오르면 광개토왕비처럼 기골이 장대한 유언비가 우리를 맞이한다. 이 유언비는 이순신 순국 400주년이 되는 1998년 12월 16일 추모식 날에 제막되었다. 전남 고흥 금산도에서 가져온 높이 8m 자연석에 `戰方急愼勿言我死`(전방급신물언아사)라고 새겨져 있다. 조카 이 분(1566~1619 희신의 둘째)이 쓴 `행록`에, "여명이 밝아 올 무렵 공이 왼쪽 가슴에 총탄을 맞고 방패로 앞을 가려라. `지금 싸움이 한참 급하니 내가 죽었단 말을 하지 마라` 하고 가셨다" 라고 기록하고 있다. 아! 이순신은 죽음의 순간에도 일본군은 사기가 오르고 부하들은 사기가 꺾길 것을 염려하여 자신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하고 가신 것이다. 이 비(碑)는  당시 해군총장 류삼남 대장이 쓰고, 새겼다. 박석이 깔린 중앙 진입로와 양쪽으로 반송이 반겨주는 가운데 사당으로 들어간다. 고현면 차면리 산 125번지에 있는 이충무공 유적지는 1973년 6월 11일 국가문화재 사적 232호로 지정되었다. 임진왜란 후 4주갑(환력)이 되는 1832년(순조 32)에 이순신 장군의 8세손 이항권 삼도수군통제사가 유허비를 세웠는데, 높이 187㎝, 넓이 75.5㎝, 두께 22㎝ 화강암으로 된 이 비는 예조판서 겸 홍문관대제학 홍석주가 글을 짓고 예문관 제학 이익희가 글을 썼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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