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대교 탈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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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대교 탈출기
  • 남해타임즈
  • 승인 2022.02.11 10:18
  • 호수 78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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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경의 남해일기

 남해대교가 건설되기 전에는 `섬`이었던 남해의 사람들은 섬 안 생활에 아주 익숙해져 있어 산비탈을 일구고, 어로행위를 해왔을 거라 짐작한다. 도서 벽지에도 분교가 있었으니 학구열로 남 뒤에 서라면 서러운 사람들이 남해사람들 아니겠는가. 부모님들은 손이 부르트는 줄도 모르고, 섬 속의 척박한 땅을 일구어 자녀들은(거의 장남 위주였지만) 객지 공부를 시켜 남들보다 앞에 서고, 남들보다 위에 앉길 바랐다. 나는 섬에 남았지만, 내 자식만큼은 땅을 딛고 서서 경제성장의 물결 속에 합류하길 바라는 것이 부모사랑 아니었나 싶다. 
 
 실제 내가 자라면서 객지의 친척들이 오시면 "다리 건너서 성공하지 않은 남해사람은 없는기라, 남해사람들과 같이 일을 해보면 정말 다르다, 끈기있게 끝까지 해내고, 알뜰하게 살림을 해낸다"는 말을 훈계처럼 달고 하셨다. 그래서, 어릴 때는 나도 남해사람이라 자동빵으로 성공할 줄로 기대하며 그 훈계들도 달게 듣던 시절이 있었다. 
 
 올해는 고요함 속에 왁자지껄한 설날을 보냈다. 네 남매 중 남해에 살고 있는 세 남매는 철저한 개인방역 속에 새해 덕담을 나누고, 객지에 사는 막냇동생은 온라인으로 안부를 나누었다. 객지에 사는 조카들까지도 할머니들을 직접 만나지 못하는 코로나 이산가족이었다. 남해대교를 탈출하지 못하고 남은 우리끼리의 잔치를 벌였다. 
 
 우리 남매들의 남해살이에 대한 불평은 명절이면 발동했다. 1990년대, 명절이면 교통체증에 대한 뉴스가 어김없이 나왔다. 설날이면 고속도로가 주차장이 되어 자가용이나 버스가 거북이 걸음으로 움직이던 자료화면, 귀성객을 위한 기차표나 버스표를 몇 개월전부터 예약해야 하는 정보, 백화점마다 선물 꾸러미가 금새 동난다는 소식, 시골 살던 우리들에게는 신박하기만 한 뉴스거리였다. 
 
 설날 아침에는 연례행사로 떡국제를 지내고, 커다란 상 앞에 둘러앉아 한 살 더 먹기 위한 떡국대잔치를 벌였다. 떡국상 앞의 대화는 수년간 같은 주제였는데, 남해말로 씰미 나기는커녕 처음 하는 것 마냥 새롭기만 한 이야기였다. 우리집에서 제일 개그감 충만한 내가 말꼬를 트는 시간이었다.
 "빨리 묵고, 차 막히기 전에 외갓집에 세배가자."
 "하모, 연경이 말이 맞다, 식기 전에 어여 묵고, 쌔이쌔이 움직이여. 차 막히몬 점심 넘어서 도착할라"
 두 번째로 개그감 충만한 엄마가 한수 거든다.
 "엄마, 좀 먼 데로 결혼하지. 그래야 우리도 차 오래타고, 외갓집 가는 기분도 나고 올매나 좋아여."
 "너그가 좀 커봐라. 친정이 가까운 기 올매나 좋은지 알때가 올끼다."
 논두렁 하나를 사이에 둔 마을로 시집장가 든 엄마와 아빠는 이웃사촌이었다. 하나의 집을 두고, 아이들은 외가로, 아빠는 처가로, 엄마는 친정으로 향했던 시간. 우린 서로 다른 곳으로 향하는 것처럼 굴었지만, 앞서거니 뒷서거니 외할머니를 만나러 가는 길은 늘 즐거웠다. 기껏 해야 걸어서 10분 남짓한 거리를 걸음을 아껴가며 걸었다.
 
 밥 먹을 때 젓가락을 멀리 잡으면 먼 곳으로 결혼한다는 말을 누가 지어 냈는지 집에서는 언니와 내가, 학교에서는 친구들끼리 누가 더 멀리 젓가락을 잡고 밥을 먹는지 내기까지 할 정도였다. 젓가락을 바투 잡고 먹는 친구들에게는 "니는 이 촌구석이 그리 좋나"라며 시골뜨기 취급을 하고, 젓가락을 멀리 잡는 친구들에게는 "니 서울로 시집가몬 내 서울구경 좀 시키주라"라며 미리 예약을 했다. 젓가락이 남해대교를 탈출시켜 줄 것 같은 희망적인 기도문 같은 것이었다. 
 
 아이들에게 섬밖의 일상도 알려주고 싶은데, 남해대교 탈출하기는 이제 해외여행을 계획하는 것처럼 거대한 목표가 되고 있다. 30여년이 지난 올해, 그때처럼 `수리수리 마수리, 남해대교 탈출하기, 얍!`을 주문처럼 외워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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