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대교의 비하인드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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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대교의 비하인드 스토리
  • 남해타임즈
  • 승인 2022.03.10 16:30
  • 호수 78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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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 이환성 등자룡장군 기념사업회장
그날 1, 남해대교는 저도(猪島)에서 잉태 되었다
이  환  성등자룡 장군 기념사업회 회장
이 환 성등자룡 장군 기념사업회 회장

1966년 8월 5일 마지막 여름더위가 기승을 부릴 때 서울 성동구 약수동 집에 한통의 전화벨이 울렸다. 진해 해군기지 인근 박정희 대통령의 하기휴가지 저도(猪島)에서 당시 대통령 경호과장(신동관)의 흥분된 전화였다.
 전화 당시 전후 불문으로 "대통령께 큰 선물을 받았다. 휴가도 받았으니 부산 해운대 극동HOTEL로 내일 일찍 출발하라"하고는 끊었다. 
 다음 날 소형승용차로 근 7시간 걸려 부산으로 가는 차안에는 누님과 온갖 추측을 했어도 설마 남해대교는 꿈에도 없었고, 경호실장 승진 외는 없는 것으로, 누님은 나에게 `이제 집안일을 도맡아라`라면서 흥분과 기대 속에 해운대 도착했었다.
 글을 쓰는 지금도 그날은 머릿속이 하얗고 웃지도 울지도 못한 평생 느껴보지 못한 날이었다.
 갑자기 호텔문 밖으로 누님의 격앙된 소리와 서울로 되돌아가겠다면서 누님은 제(필자)게 창피해 죽겠다며 울부짖었다. 매형(신동관)은 절대 입 밖에 내지 말라는 엄명으로, `설마`라는 단어가 이럴 때구나 생각됐다. 아무튼 남해대교 건설이라는 상상도 못한 크나큰 선물이었지만, 그날 이후 우리 집안에서 `남해대교`니 `다리`라는 이름은 금기가 되었다. 
 그날 후, 속전속결이었다. 대통령께서 대의명분은 `이순신 장군 순국지`였다. 내각의 정책과 예산은 청와대 경제수석, 한편 국회에서 야당의 극렬한 반대는 우리지역의 국회의원 최치환 국회의원 역할이 컸다. 

 

그날 2, 호사다마(好事多魔)의 빛과 그림자

 남해대교는 노량해의 물살이 세고 깊어 양쪽에 교각을 세워 연결하는 현수교(懸垂橋)로 일본기술로 설계하였다. 1982년 동네 카페 `귀도`에서 우연하게 고향이 남해라 했더니 이후락(전, 중앙정보부장, 주일대사)에게서 설계도면을 자신이 일본에서 갖고 왔다고 직접 들었다. 
 1969년 5월 청와대 경호실 승격으로 경호차장 겸 처장으로, 필자는 보좌관실에 출퇴근을 하면서 고향과 향우들 담당을 하게 된다.
 당시 민주공화당의 1970년 가을, 유달리 8대 국회의원 공천을 받겠다고, 남해에는 최익명, 정영섭, 김종길(5.16으로 취임 못한) 등 향우들은 세력을 모았으나, 당시 최치환 국회의원은 정계거물로 비교되지 않았기에 때가 되어 그런가 하고 관심도 없었다.
 왜냐면 오랜 기간의 박종규 실장은 오직 정보부장이 꿈이었고, 대통령께서는 사리사욕을 탐하지 않는 순박한 신동관을 실장이 시기할 정도로 신임했기 때문이다.
 1970년 말, 공화당에서는 당시 박종규 실장을 마산에, 이후락 일본대사는 울산으로 차출설이 떠돌았는데, 마산을 둘러본 박실장은 당선에 자신이 없음을 느껴, 강한 거부를 하였고, 최치환 의원은 밝힐 수 없으나, 정치적 변수로 공천에서 탈락, 무소속으로 나오면 대적이 없다며 엉뚱하게 우리에게 불똥이 튀었다. 남해대교 문제도 포함된 그 시절 그런 큰 예산의 국책사업은 정치자금, 특히 대교를 자신의 공적으로 한 신뢰성도 작용했다는 소문이 있었다. 
 이날이 나에게는 그간의 청운의 푸른꿈이 사라지게 되었고, 인생의 행로를 바꾸게 된 절망의 변곡점이 되었다. 나는 친척으로 국회의원 비서직은 싫었다. 국회의원을 뺏고 뺏기고가 아니다. 오히려 자기가 지키지 못한 `내 탓이요`이다. 우리가 날벼락의 피해를 본 것이다. <다음 호에 계속>
※ 외부필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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