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해대교의 비하인드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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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대교의 비하인드 스토리
  • 남해타임즈
  • 승인 2022.03.11 17:00
  • 호수 78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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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자기고 │ 이환성 등자룡장군 기념사업회장
그날 3, 전화위복(轉禍爲福), 남해대교가 흔들렸다
1973년 6월 22일 남해대교 개통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남해대교를 건너고 있다.
1973년 6월 22일 남해대교 개통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남해대교를 건너고 있다.
이 환 성등자룡 장군 기념사업회 회장
이 환 성등자룡 장군 기념사업회 회장

 남해대교는 그가 국회의원 신동관이 아니고, 청와대에 있었으면 더 빨리 되었을 것이다.
 1971년 3월 봄날. 평생을 박정희 대통령 곁에서 신변보호의 경호업무가 천직으로 해왔고, 그 여력으로 오직 고향발전과 고향인을 돕는 게 유일한 보람이었던 신동관 정치초년생은 뜻하지 않은 국회의원 공천을 받게 되었다. 자유당에서부터 특히 막강한 경찰의 대부 격으로 정계 중진 정치인이던 최치환 의원 무소속 출마를 하겠다며, 당시 남해군민관(현, 수협중북지소)에 200여 명의 당원과 지지자를 모아, 당시 유행한 "당신과 나 사이에 저 바다가 없었다면"이란 노랫말로 울분을 토하며 "이제 남해대교는 안 된다. 내 손에 장을 지지겠다"라는 발언을 하게 되었다. (남해대교는 1969년부터 1971년 당시 예산이 없어 공사 중단 상태였다.)
 반면, 신동관 의원은 평생 처음 겪는 몸에 맞지 않는 옷을 입듯 선거민들을 만나 반 사기꾼 행세를 해야 하는 정반대의 일상에 심신이 고달픈 일과로 무척 힘들어했다. 내가 군민관 옆 우리집에서 들은 최치환 의원의 연설 내용을 보고했고, 그는 경찰에 확인하고는 곧장 청와대에 전화를 하였다. 
 
 (전화상황)
 "나 신동관인데 바꿔요…. 접니다. 내가 언제 정치한다고 했나요. 당장 때려치우겠습니다. 뭘 해도 밥 못 먹겠어요. 보고하세요. 안 한다니까요. 나 때문에 남해대교가 안 된다는데, 내가 고향에 못할 짓 하려고 국회의원 합니까? 때려치웁니다"라며 전화를 끊어버렸다. 20여분 뒤에 전화가 왔는데 "책임지세요." 재차 다짐을 받고서야 그제야 "죄송합니다" 하고 끊었다. 
 (전화상황 끝)
 
 전화 상대는 청와대 김정렴 비서실장이었고, 그 즉시 대통령께 보고하고 걱정 말라는 답변을 받은 것이다. 감히 박정희 대통령께 몽니 부리듯 부자지간에나 있을 수 있는 투정이었다. 이렇듯 대통령과의 관계였다. 

 

그날 4, 노량해 물결과 함께 역사는 유유히 흘렀다
신동관 의원 기념탑.
신동관 의원 기념탑.

 이것만 보더라도 여느 정치인들의 숙명도, 운명도 아닌, 당시 정치적 상황으로 국회에서 대통령 친위세력으로 당에서 강제 요구해 차출된 것이다. (당시 비사는 밝힐 수 없다.)
 ※ 후일담으로, 급변의 정치적 사정에 밝은 이들은 육영수 여사 사건과 10·26사건은 신동관이 경호실장으로 있었으면 발생하지 않았을 거라고 특히 김정렴 전 비서실장도 얘기했었다고 한다.
 
 - 제8대 국회(남해) 1971. 5~1972. 10. 1. 7 (국회해산, 유신선포) 
 - 제9대 국회(남해, 하동) 1973. 3~1979. 3.10.
 - 제10대 국회(남해, 하동) 1979. 3 ~1980. 5. (국회정지, 1980.10.27. 해산)
 
 8~10대 3선 국회의원직 9년의 국회의원 신동관 자택 종로구 이화동에는 매일 20~30명의 내방객 향우와 남해, 부산에서 이력서가 수십 통씩 날아들었고, 그는 밤낮으로 동냥하듯 뛰었다. 개인 사생활은 뒷전이었고, 1979년 10월 26일을 끝으로 그토록 사랑하고 애지중지하던 남해 고향과도 다 내려놓고 마음속으로만 품었다. 
 10·26 이후 대통령께서 떠났는데, 더 이상 내가 할일 없다며 국회의원에 미련을 버렸었다. 이 기간동안 우리 남해에는 많은 예산을 들여왔고 짧은 기간에 엄청난 지역 발전을 이루었다.
 2018년 임종 직전에 내가 핸드폰의 남해대교 노량공원의 공적비를 보여드리자 눈을 지그시 감고, 회안에 젖었던 게 마지막이었다. 개인의 정치적 욕망은 단 하나의 생각도 없이 오직 고향에 도움이 되고자 했다. 남해에는 참 고마운 분이었다. <다음 호에 계속>
 
 <청남 신동관 선생 생전어록>
 
 - 청와대 경호차장 때 청와대 사무실과 자택에 향우들의 출입이 많았다고 정보기관에서 보고가 많았다 『대통령께 보고해. 나 있을 때 고향사람들 실컷 이용하라고 해!』
 - 국회의원 때, 남해대교를 최치환 의원이 했다고 했으나, "누가 했으면 어때, 고향사람들이 잘 이용하면 됐지!"라고 하였다. 
 
 남해대교 개통에 맞추어, 남해 최초의 국도 `제19호선`을 미조에서 원주까지 연장(승격), 남해대교를 정부에서 관리하게 하고, 이락사와 충렬사를 사적으로 승격, 하동대교 입구와 노량에서 이락사까지 아스팔트 포장과 벗나무로 단장, 환상적인 `관광남해의 초석`이었다.
 
 `남해각`은 청와대 경호차장시 도움을 준 보답으로 해태제과에서 건립 헌납한 것이다. 
 
 우리 고장에서 두 번 다시 이런 분을 맞을 기회는 없습니다. 
 청남 신동관 선생은 정녕 `남해의 보물`이었습니다.  

 ※ 외부필자의 기고는 본지의 편집방향과 다를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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