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 마중, 봄은 마술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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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 마중, 봄은 마술사
  • 남해타임즈
  • 승인 2022.03.11 17:21
  • 호수 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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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경의 남해일기

 불각시리 `냉이`에서 나는 흙냄새를 맡아보고 싶고, `쑥`에서 느껴지는 건강함이 기다려지는 한 주였다. 경사가 급한 산비탈에 얼어붙은 흙을 간신히 붙잡고 자라고 있는 칡덩굴은 모진 바람과 세찬 추위를 견디고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점심시간에 최단거리로 산책하는 남산공원에는 거친 나뭇가지를 뚫고 솜털을 단 목련봉오리가 빼꼼히 눈을 내밀고, 개인들이 올리는 SNS에는 매화나 복수초들이 눈과 함께 게시되기 시작했다. 
 
 한해를 시작하는 첫 번째 절기인 입춘을 맞고, 우수가 지나고, 겨울잠 자던 동물들이 깨어나는 경칩이면 봄이 코끝부터 전해지는 것 같다. 남해읍 장날이면 나무시장이 열려 잎이 알록달록한 꽃나무와 화분에 곱게 키운 봄꽃까지 예술시장 같다. 봄은 겨울을 잘 다스리는 마술사 같다. 남해의 겨울은 파릇함이 연속적으로 이어지는 곳이라 마음이 시들지 않으면 언제나 빛나는 봄이었다. 해풍을 맞고 알알이 여물고 있는 마늘밭과 봄이 다 되도록 자라고, 또 자라나는 시금치밭. 햇볕을 받아 어느 날은 푸른 바닷물도 윤슬이 내려 반짝였다. 봄이 오는 길은 끝나지 않는 이야기처럼, 도돌이표가 가득 붙은 노래처럼 더뎠다.
 
 우리 남해는 한겨울에도 바람만 불지 않으면 포근했다. 옴팡한 흙집에서 콧물을 가족처럼 달고 몇 달을 견디면 겨울이 마지못해 물러났다. 해가 길어지고 따신 날이 여러 날 반복되면 창문을 열고, 봄옷부터 꺼내곤 했다. 얌전하던 추위가 다시 고집을 부리기 시작하면 겨울옷을 목 끝까지 올리면서 `인자 봄이 되낀갑다`라고 했다. 겨울은 사람의 말소리를 알아듣는 듯 `오늘 진짜 따시다, 봄 긋다야`하면 포효하는 바람소리를 거세게 내며 질투의 화신이 되는 듯 했다. `아이고 추버라, 옹그리고 댕깃더만 온 만신이 쑤신다` 하면 따뜻한 햇살을 내주기도 했다. 삼한사온이 아주 또렷하게 나타나는 요즘이다. 봄은 겨울 땅속에서 이미 시작되고 있다. 나무뿌리들은 땅속에서 잔가지를 뻗고 물을 끌어올리며 싹틔울 준비를 한다. 새가 물고 가다 떨어뜨린 씨앗은 어떤 열매가 달릴지 모른 채 딱딱한 씨를 깨고 연한 잎이 나왔다. 
 
 어릴 적에 단감을 먹다가 감씨를 신기해한 일이 있다. 장두감이나 홍시, 곶감에서는 딱딱한 갈색 씨가 나왔지만, 단감에서는 초록씨가 나왔다. 씨를 싸고 있는 초록껍질을 벗겨내면 불투명한 우윳빛 씨가 되는데, 그 씨 안에는 연한 노란색의 나뭇잎이 들어앉아 있었다. 단감을 먹을 때마다 나오는 초록씨를 땅속에 묻으면 딱딱한 씨를 뚫고 나와 감나무가 되고, 가을이면 단감이 주렁주렁 열리는 상상을 오래도록 했다. 내가 심거나 던진 초록씨는 한 번도 감나무로 자라지 못했지만···
 
 새로 시작하는 달은 1월보다 3월이 어울린다는 생각을 했다. 계절이 봄, 여름, 가을, 겨울의 차례로 연속된다 생각해왔고, 3월이면 개학하고, 새로운 환경에 적응했다. 학년이 올라가고, 상급학교에 진학할수록 교과목도 많아졌다. 내가 좋아하는 과목은 `체육`이다. 단체로 하는 수업시간 말고, 자유활동을 하는 체육이 좋았다. 특히 봄이 되면 선생님의 수업소리가 자장가로 들리고, 몰려오는 춘곤증에 식곤증에 한창 잠 많은 나를 힘들게 했다. 차라리 운동장에 나가 파란하늘아래 봄볕을 쬐며 국민체조만 해도 좋았던 시절···
 
 내가 가장 힘들어했던 과목은 `가정`수업이었다. 가정수업 중 집에서 해먹지 않는 함박스테이크나 탕수육 같은 음식만들기는 적성에 맞았지만, 자리에 가만히 앉아 초크로 옷감위에 축소판의 치수를 그려 넣고 가위로 잘라서 바느질해서 치마나 저고리, 버선을 만드는 일은 너무 힘들었다. 수업으로 마치는 것이 아니라 수업시간에 끝내지 못한 학생들은 집에 가서 혼자 완성을 해서 과제로 제출해야 그 과목의 수업이 끝났다. 손바느질도 얼마나 종류가 많았던지 홈질, 박음질, 감침질, 공그르기 등 여러 가지의 바느질을 활용하여 하나의 과제를 만들어내야 했다. 나는 바느질이 안 되는 대신 아주 솜씨있는 언니가 내 옆에 있었다. 
 "줘봐라. 수업시간에 잤나."
 "수업시간에 자는 사람이 오데 있네. 내가 공부는 몬해도 자지는 않는다."
 "근데, 이기 바느질 배울 때 기본으로 배우는 긴데, 머이 진도가 하나도 안 나갔네."
 "배운닷꼬 다 아나? 바느질 배운다고 다 알면 전부 다 양장점 채리고로?"
 "말이나 못허모 미얄시럽지나 않지. 이리 줘봐라. 그리가 낼 아침에 숙제 내긋나."
 "내는 밤을 새서라도 할라 쿠는데, 언니 니가 주라해서 준다. 내가 못해서 주는 거 아니다이."
 나는 바느질 못하는 자격지심은 억지로 숨기고, 행동은 재빠르게 하던 과제물을 언니 손에 넘겼다. 
 한 땀 한 땀 수작업으로 공을 들인다는 건 정말 대단한 일이다. 조각, 회화, 꽃꽂이, 붓글씨, 음식 등 사람들이 손으로 이루어내는 것들은 무궁무진하다. 나는 바느질을 워낙 못해서 옷을 짓는 사람들이 무척 대단해 보인다. 남해출신의 류정순 한복명장의 조선궁중복식전(2022년 3월 8일~3월 27일)이 남해유배문학관에서 초대 전시된다.
 
 언니야, 우리 봄마중 가자. 언니야, 우리 조선궁중복식전 구경 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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