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만난 이환성 향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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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만난 이환성 향우
  • 남해타임즈
  • 승인 2022.03.11 17:26
  • 호수 78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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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고향, 나의 삶 128 │ 碧松 감충효
碧松  감  충  효시인 / 칼럼니스트
碧松 감 충 효
시인 / 칼럼니스트

어쩌다 인연되면 얼레 줄 감고 풀 듯   
연으로 띄웠다가 밤안개로 내리다가 
아슴한 고향 노래도 같이 불러 봅니다    
 
 필자가 이환성 향우를 처음 만난 것은 2012년 재경남해읍향우산악회에서 충청도의 옥순봉을 포함한 단양팔경을 돌아볼 때였다. 이때 이환성 향우는 산행에 참가한 모든 향우들을 단양관광호텔로 초청하여 송이버섯 요리를 주 메뉴로 한 맛있는 음식을 대접하셨다. 점심 식사 후 호텔 건물 앞 `관광보국(觀光報國)`이라는 글자가 새겨진 큰 바위를 배경으로 산행에 참가한 모든 향우들이 단체 기념사진을 찍던 일이 생각난다. 그리고 누군가 `관광보국(觀光報國)`의 연유에 대해 물으니 지방에서의 호텔사업은 이익보다는 좋은 쉼터를 제공하는 사회사업정신으로 국가에 기여하자는 뜻으로 이 대형 석물을 세웠다고 하셨다.
 긍정적 사고와 투철한 국가관이 엿보이는 대목이다. 그리고 필자가 1년 후 재경남해중·남해제일고 총동문회지 룙망메새룚의 편집주간을 맡아 동문의 라이프 스토리를 취재하기 위해 이환성 향우를 다시 만났다. 인터뷰 과정에서 평소의 인생관을 물으니 `노블레스 오블리주`로 `가치 있는 삶`을 사는 것이라고 힘주어 말했다. 이환성 향우의 `관광보국`정신과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인생관, 그리고 힘주어 말하는 `가치 있는 삶`에 대해 심심한 존경을 표한다. 이러한 삶을 실천하는 여러 사례는 언론을 통하여 알려진 바 있기에 지면이 한정된 여기에서는 언급을 하지 않기로 한다.
 또한 이 향우는 고향의 역사를 간직한 금석문이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거나 방치하는 점을 지적했다. 옳은 지적이다. 노량 충렬사 옛 계단 앞에 세워진 표지석은 사라졌고 장평소류지의 축조 기록이 새겨진 큰 바위는 방치되어 있는 상태라고 했다. 이 두 곳의 기록에는 이환성 향우님의 조부님이 기여한 내용도 들어 있었다고 한다.      
 다시 동문회지 인터뷰 때로 돌아가 몇 해 전 이 향우가 고향신문에 기고한 《거마와 빵주사 이야기》에 대해 여쭤봤다. 이 스토리는 나이든 60대 이상 남해인들에게 아련한 향수를 가져다 주는데 이러한 스토리를 쓸 수 있는 것은 이 향우의 마음이 항상 고향을 향해 있음이 아니냐고 묻는 필자의 질문에 누구나 고향 사랑의 마음이 있겠지만 자신은 고향을 향한 마음이 누구보다 크다고 했으며 이때까지 고향을 위해 했던 일들도 모두 그런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겠느냐고 반문했다. 그리고 향우님들께 꼭 하고 싶은 한마디를 당부했더니 "향우회나 고향 일에는 사리사욕이 있어서는 안 된다"며 신동관 의원과의 당시 청와대 시절 찾아 온 고향인들 모두의 민원을 다 해결해 줄 수 있었다는 게 믿어지지 않는다며, 이러한 기회를 가졌던 은혜에 항상 감사를 한다며 많은 일화를 들려주셨다. 주마등처럼 이어지는 선배와 후배의 이야기들은 때로는 학창 주변으로 때로는 봉천을 타고 내려가다가 강진 바다를 저어 선소항으로 이어지면서 어쩔 때는 망운산을 올랐다가 멀리 금산 소풍 가던 추억의 길도 밟으면서 밤이 깊어가는 줄도 몰랐다. 못다한 이야기는 다음에 또 나누기로 하고 필자가 먼저 자리를 일어선 것은 마지막 지하철을 타기 위해서였다. 그 해 12월 19일 동문회지 출판기념일을 겸한 송년회 때 이환성 향우를 만나 두툼한 동문회지 룙망메새룚를 전하며 악수하던 때가 엊그제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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