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도의 길에서 안식처를 구하고자 했던 어른, 이제 편히 쉬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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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도의 길에서 안식처를 구하고자 했던 어른, 이제 편히 쉬소서
  • 김수연 기자
  • 승인 2022.03.18 15:57
  • 호수 78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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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문화에 족적 남긴 청계 류정렬 선생, 103세 일기로 타계
43년 교직생활 마치고 88세까지 사회봉사 이어가
2006년 생전의 청계 류정렬 선생 모습.
청계 선생의 삼남인 류지관 목자동물병원 원장이 부친의 살아생전 모습을 회고하고 있다.
청계 선생의 삼남인 류지관 목자동물병원 원장이 부친의 살아생전 모습을 회고하고 있다.

 청계(靑溪) 류정렬(남해읍 아산) 선생이 지난 8일 10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셨다. 
 생전에 한시와 서도에 능통했던 청계 선생은 평소에도 "세상이 변할수록 기본을 가르쳐야 한다"며 역사와 도덕 교육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밝고 투명한 세상이 되었으면 한다"는 신념을 설파해 지역사회에 귀감이 된 어른이셨다. 
 2007년에 낸 선생의 미수(米壽, 88세) 기념 문집 「청계심서」에 따르면, 1920년 서면에서 출생한 고(故) 류정렬 선생은 유년 시절 10년간 서당에서 천자문부터 명심보감, 격몽요결, 소학, 대학, 논어 등 많은 한서를 공부했는데 이것이 사회생활의 밑거름이 되었다고 한다. 1941년 22세에 김해 대강초등학교에서 교직 생활을 시작했다. 1960년대에 양아분교에 재직할 당시 `인생의 궁극 목적은 마음의 안식처를 구하는 데 있다`는 인생에 대한 `마음의 갈 길`을 설정하고 그에 따라 살고자 했다고 한다. 1986년 성명초등학교 교장으로 퇴임해 43년 교직생활을 마감했다. 선생은 퇴임 당시 국민훈장 목련장을 받았다. 
 
교장 퇴임 후 사회봉사에 적극 나서
 퇴임 후에는 사회봉사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1986년부터 2년간 남해문화원장을 하며 정기간행물인 『남해문화』를 어려운 형편에도 중단 없이 발간했다. 1987년에는 송강 한석현 선생과 함께 퇴직 교장들의 모임이자 한시회인 남해이우회를 창립해 고전문화의 맥을 잇고 후세에 전하고자 노력했다.
 또 남해중학교 자원 상담교사로 10여 년간 봉사하고 남해여중에서 서예를, 제일고등학교에서 제례 등을 가르치기도 했다. 학생들을 대상으로 방과 후 사자성어 교실을 열고 문화류씨 회관에서 성인들에게 서예와 일어도 가르쳤다. 문화류씨 종친회장을 역임하며 문중 업무와 회관 관리도 꾸준히 해왔다. 
 2005년에는 이러한 공로를 인정받아 남해군 문화대상을 수상했다.    
 그런가 하면 2007년에는 남해군보건소 주최 건강노인 선발대회에서 으뜸상을 받고 경상남도 장수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청계 선생은 "항상 안정된 마음으로 생각하고 일하고 운동하고 노래부르고 남을 먼저 생각하는 호연지기를 살려서 서로가 존경하고 사랑하는 진정한 삶을 유도할 것이다"라는 말씀을 남겼다. 
 
무병장수 비결은 `도를 넘지 않는 것`
 슬하에 4남2녀를 두었던 청계 선생은 평소에 자녀들에게 매우 엄격하셨다고 한다. 선생의 삼남인 류지관(73) 목자동물병원 원장은 아버지를 "명예를 중히 여기셨지만 다정다감한 분은 아니었다. 예의범절에 철두철미했고 생활에서 늘 정도를 지키려고 했던 분"으로 기억한다. 류 원장은 돌아가시기 전까지 특별한 병환이 없었다며, 아버지의 건강 장수의 비결로 특별한 것은 없으나 `도를 넘지 않으려는 마음가짐`을 꼽았다. 하루 삼시세끼를 꼭 지키고 과하지 않은 반주를 즐기셨다고 한다. 
 선생은 평소에 노래를 즐겼는데 류 원장은 자신의 칠순잔치가 아버지의 백수연이 되었다며 그때 가곡 `오 솔레미오`를 불러드린 것을 추억하며 미소를 지었다. "돌아가시기 보름 전 막냇동생이 내려왔을 때 아버지가 기분이 좋아 `해운대 엘레지`를 가사 하나 안 틀리고 부른 다음 돌아가실 때까지 의식이 없으셨다. 그래서 고통도 없으셨다." 돌아가신 날부터 3일간 날씨가 아주 맑았고, 남해의 매서운 `할망댓바람`도 없었다고.  
 류 원장은 "교장으로 정년 퇴임하면 일선에서 물러나 조용히 쉬는 게 보통인데 아버지는 늘 뭔가를 하려는 의욕을 갖고 계셨다. 사회활동도 하고 문중회장도 하고 서도도 가르치고 한시도 쓰고 즐기셨다. 좋은 기사가 실린 신문은 스크랩을 해서 자식들에게 남기시곤 했다"고 말했다. 그러면서 "교훈이나 유언보다는 몸으로 보여주는 게 중요하다. 아버지가 이렇게 살아오셨다는 게 유언이고 교훈"이라고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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