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배문학의 향기 만끽하며 읍 가로질러 읍내바래길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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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배문학의 향기 만끽하며 읍 가로질러 읍내바래길 걷다
  • 남해타임즈
  • 승인 2022.03.25 09:58
  • 호수 78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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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선1번 읍내바래길 2

 남해유배문학관은 전국에서 최초로 종합적이며 입체적인 규모를 갖춘 유일한 문학관이다. 남해는 제주도, 거제도, 진도와 함께 고려 시대와 조선 시대에 200여명의 유배객이 다녀가거나 생을 마감한 유배지로 유명한데, 서포 김만중 선생의 어머니 윤 씨 부인의 생일인 11월 1일(음9월 25일)을 기준하여 지난 2010년 11월 1일 개관하였다. 강화도에서 피난가는 배 안에서 유복자로 태어났다 하여 아명이 `선생`이었고 홀어머니 슬하에서 자라 효성이 지극했던 김만중 선생을 기리는 뜻에서다. 


 유배문학이라고 하면 대부분 `충신연주지사(忠臣戀主之詞)`라는 가사를 포함한 시가류가 대부분이지만 남해의 유배문학은 『구운몽』, 『사씨남정기』라는 소설과 기행문, 평론집 등이 다양하게 존재한다. 우리나라 최초의 유배문학관인 남해유배문학관은 부지 3만7469㎡, 건물면적 2416㎡에 향토 역사실과 유배문학실, 유배체험실, 김만중 특별실, 다목적홀, 야외공원을 갖추고 있다.


 중국의 유배문학은 진시황 몰락의 계기가 되었던 초나라 시인 굴원, 야랑으로 유배간 이태백, 그리고 소동파, 구양수 등이 유명하고, 일본의 유배문학은 9세기 헤이안 시대 후쿠오카로 유배간 `미치자네`가 유명하지만, 유럽의 유배문학이야말로 독보적이다. 유럽의 유배문학 중에 빅토르 위고의 『레미제라블』은 프랑스에서 성경 다음으로 많이 팔린 베스트셀러라는데, 영국의 저지섬에서 사면령을 거부하고 저술한 것이라고 한다.


 또, 러시아 푸시킨의 작품은 세계에서 가장 많이 읽힌 작품이란 걸 여러분은 벌써 알고 있을 것이다. 푸시킨은 자유를 갈망하는 그의 시가 문제되어 1820년 5월, 상트페테르부르크에서 남러시아로 4년간 유배 갔다고 한다. 유명한 시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에서 푸시킨은 "삶이 그대를 속일지라도 / 슬퍼하거나 노여워 말라 / 슬픔의 날 참고 견디면 / 기쁨의 날 찾아오리라/ 마음은 미래에 살고 / 현재는 괴로운 법 / 모든 것이 순간이고 모든 것이 지나가리니 / 지나간 모든 것은 아름다우리" 라고 했다. 일설에는 유배 다녀오는 동안 아내가 친구와 스캔들이 나서 화가 난 나머지 결투를 신청하여 그 와중에 사망했다는 이야기도 있다. 시베리아 유배지에서 죄인들의 이야기를 쓴 도스토옙스키의 『죄와 벌』, 솔제니친의 『수용소군도』도 대표적인 유배문학이다. 이제 유배문학관을 지나 해양초등학교 정문에서 골목으로 청년사업 프로젝트 핫플레이스인 레스토랑 카페 《절믄나매》를 지나가며 달달한 라떼 한잔 하고픈 생각 굴뚝같지만, 갈 길이 멀다고 발걸음을 재촉하는 탓에 그냥 지나간다.


 남해군의 남해읍은 남해군의 중심이며 면적 27.13㎢에 인구는 1만3098명(2021년 12월말 기준)이 살고 있다. 대표적인 고봉은 봉성의 괴음산(604m), 아산의 관대봉(469m), 망운산 동봉(785m), 아산 봉황산(167m), 봉강산(104m), 호두산(239m) 등이 있다. 남해의 역사상 등장은 신라 시대인데 우리나라 최고의 역사지 삼국사기 권 제34 잡지 제3지리 1조에 "남해군은 신라 신문왕 초에 전야산군을 설치한 섬인데 관할현은 난포현과 평산현을 두었다"라고 기록되어 있고, 경덕왕 16년(757)에는 전야산군을 남해군으로 개칭하였다. 그후 고려 시대에 와서는 현종 9년(1018)에 다시 남해현으로 고쳤다가 왜구들이 준동하자 공민왕 7년(1358) 진주관내 대야천 부곡으로 옮겼다가 다시 세종 19년(1437) 남해현으로 복귀하였고, 고종 32년(1895)에 23부제 실시에 따라 진주부 관할의 남해군이 되었으며 그 이듬해인 고종 33년에 13도제 실시에 따라 비로소 경상남도 남해군이 되었고, 광무9년(1905) 창선도가 진주목에서 남해군으로 편입되었다. 또 다른 남해읍성 기록인 신증동국여지승람에 보면 고려말, 조선 초기, 학자이며 정치가인 정이오(1347~1434) 기문에 "남해는 바다 복판에 있는 섬으로서, 토지가 비옥하고 물산이 번성하여 국가에 도움이 되는 것이 적지 아니하다. 그러나 그 지역이 왜국과 아주 가까워 경인년부터 왜적의 침략을 입기 시작하여 혹 붙들려 가고 혹 이사하여 군의 속현인 평산, 난포가 쓸쓸하여 사람이 없었다. 왜구의 방비를 위해 성을 쌓아야 한다. 지금 임금이 즉위한 지 4년 만에(1404년, 태종4) 왜구 때문에 진주 땅으로 피란하였다가 남해현을 복구하였고, 이때 구라량(仇羅梁:사천) 만호 임덕수가 현령을 받고 겸임하여 읍성을 축성하였다. 이웃 고을 하동, 사천, 명주, 고성, 진해 다섯 고을 사람을 부려 성을 쌓고 돌을 포개어 해자를 만들고 2월에 시작하여 3월에 준공하였다. 남해읍성(둘레2,867척, 높이13척)은 성안에 우물과 샘이 있다"고 하였다. 조선 시대 말 이후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성벽은 허물어지고 군청과 초등학교가 세워지고 주택과 도로가 들어서면서 흔적 일부가 남아있는 쓸쓸한 현실이다. 


 그러나 2022년 방문의 해를 맞이하고 활기를 불어넣기 위해 남해군은 2022년 2월 현 위치에서 `전국에서 가장 오래된 청사를, 대한민국 최고의 청사로` 탈바꿈시키겠다고 천명하고 모든 행정적, 기술적 준비를 마무리하였다. 현 청사는 1959년에 지은 2층 건물로, 그동안 증·개축을 거듭해 현재에 이르고 있으며, 낡고 공간도 협소해 민원인들이 이용에 많은 불편을 겪자 신청사 건립을 추진하면서 부지를 확장해 연면적 1만9천806㎡에 896억원으로 건립하며 2023년 착공해 2024년 말 준공할 계획이다.


 남해축협 앞을 지나고 100m쯤 직진하여 우회전 먹자골목으로 계속 이어 걸어가는데, 도시재생뉴딜사업의 일환으로 들어선 남해청년센터 `바라`에서 울려 퍼지는 시 낭송 소리가 풍경을 타고 흐르는 읍 사거리를 남쪽으로 가로질러 읍 농협까지 다시 좌로 돌아 어시장으로 들어간다. 어시장에서 팔딱거리는 싱싱한 활어와 해산물 반찬거리를 필요한 만큼 사두고 택배를 보낸 다음, 우로 돌아 공용터미널까지 가면 읍내바래길은 기분 좋게 종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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