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의 남해대교와 이순신순국공원 품은 노량바래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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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의 남해대교와 이순신순국공원 품은 노량바래길
  • 남해타임즈
  • 승인 2022.04.04 14:50
  • 호수 7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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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부경의 바래길이야기 35 │ 지선2번 노량바래길 1

남해군 설천면 노량마을 유람선 선착장 앞에서 거북선, 충렬사, 노량공원, 산성산 언덕, 노량대교 전망대, 남해대교 레인보우 전망대, 유람선 선착장까지 원점 회귀하는 지선 2코스인 노량바래길은 3.2㎞이며 소요시간은 1시간 내외, 난이도는 ★★★이다. 여기는 이순신호국길, 구두산목장길과 함께 3개 코스 시점과 종점이 겹치는 복잡하고 이야기와 볼거리가 가장 많은 역사·문화 현장이 밀집된 곳이기도 하다.
하여 코스 따라, 문화의 향기를 따라 바래길을 시작한다. 먼저 남해대교이다. 남해대교 하면 7~80년대 6~70대 어른들의 추억이 아련한 곳이다. 그때는 신혼부부들이 신혼여행지로 첫 손을 꼽는 곳이었고 대교를 배경으로 말 타고 사진을 찍어 거울 앞에 걸어두고 큰 자랑으로 여기던 추억이 새록새록하다.
또한 전국 학생들의 수학여행 필수코스로, 필자도 수없이 갔어도 갈 때마다 느낌이 다르고, 새롭고, 가슴 설레이던 빨강색깔 남해대교였다.
남해와 하동을 잇는 남해대교가 1973년 6월 22일 드디어 완공되었다. 동양 최대의 현수교로 우리나라의 경제발전과 고수준의 기술을 상징하는 또 하나의 금자탑을 세운 셈이다. 전장 660m, 교폭 12m, 높이 80m(해저 20m, 해상 60m)의 대교가 개통하며 남해군은 역사적 전환을 맞이하게 되며 15만 남해군민의 오랜 숙원이 끝내 이루어지게 되었다. 1968년 5월 10일 착공하여 1973년 6월 22일, 5년 1개월 12일만에 완공되어 22일 상오 11시 남해대교광장에 박정희 대통령, 장예준 건설부장관, 김 신 교통부장관, 신동관 국회의원, 최치환 경향신문사장, 정해식 경남도지사, 장치경 남해군수 내외 귀빈과 남해군민, 하동군민 등 주위 주민 10만여명이 운집한 가운데 개통식을 가졌다.
이날 박 대통령은 개통테이프를 끊고 환영 인파와 함께 대교를 건너기 시작했다. 바람이 차갑고 강풍이 불어 옷자락과 머리카락이 하늘로 치솟아 말하기도 어렵고 옆 사람 이야기를 들을 수도 없을 정도였지만 구경나온 환영 인파의 열기는 막지 못했다. 아침 7시부터 관광객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외지에서 온 관광객은 2~3일 전부터 기념식을 보기 위해 하동과 남해 노량부근에 진을 치고 있었다. 남해읍내 또한 여관과 여인숙이 초만원을 이루고 있었다. 부산~여수간 쾌속선인 엔젤호는 3일분이 매진되었고, 서울~진주간 고속버스와 비행기도 매진사태를 빚었다는 이야기다. 남해대교 건설시 총공사비는 21억 514만 6천원이 투입되었다.
노량횟집타운을 지나 거북선으로 간다. 노량포구에 정박하고 있는 거북선에 올라 조선시대의 최첨단 군함을 견학한다. 거북선을 이용한 역사·문화상품 만들기를 추진해온 남해군이 해군본부로부터 1999년 12월 16일에 인수, 군민들의 관심을 고조시켰던 일을 잊을 수 없다.
이 거북선은 1980년 1월 30일 해군 7627부대에서 각계 각층의 인사가 참가한 가운데 이은상, 조성도, 김재근 박사 등 고증위원회 16명의 고증과 자문 그리고 『난중일기』, 『이충무공전서』 등 사료를 참고하여 복원된 것이다. 제원은 전장 113척, 선체 길이 84척, 선폭 34척, 전체 높이 21척, 선체 높이 7.5척, 배 중량 150t, 승선 인원은 130명, 추진력은 노와 돛을 사용했으며 속력은 5노트, 노 좌우 8개씩, 화포는 14문이 장착 운용되었다.
또한 용두와 후미에도 포를 쏠 수 있도록 제작되었던 거북선은 조선시대 세계최고의 무적함이었다. 임진왜란 발발 1일 전에 건조하여 최초 운용은 사천해전이었고 임진왜란시는 통상 3~5척 내외를 운용하여 연전 연승하였지만, 원균의 칠천량 해전에서 전술적 운용 미숙으로 분파 침몰되어 명량해전과 노량해전에서는 거북선이 참전하지 못했다. 만약에 거북선이 참전했더라면 역사는 바뀌었을 것이다. 충렬사로 간다.
충렬사는 경주 김씨 여빈이라는 사람과 제주 고씨 승후라는 남해읍 향사(鄕士) 두 사람이 이순신 장군이 순국한지 30년이 지나도록 추모제를 지내지 못함을 안타깝게 여겨 1628년(인조6년) 사비를 들여 한 칸짜리 초옥을 세웠는데 그 후 다시 1658년 김여빈의 소장을 들은 어사 민정중이 41대 통제사 정 익에게 사당을 신축하도록 하여 사당다운 면모를 갖추고 추모하게 되었다. 〈다음 호로 이어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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