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부두의 눈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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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부두의 눈물
  • 남해타임즈
  • 승인 2022.04.11 16:00
  • 호수 7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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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해대교 개통 이전의 섬사람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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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처기 남해문학회 고문·시조시인
이  처  기남해문학회 고문시조시인
이 처 기
남해문학회 고문
시조시인

"엄마가 섬그늘에 굴 따러가면 아기가 혼자 남아 집을 보다가 바다가 불러주는 자장 노래에  팔베고 스르르르  잠이 듭니다." 
섬집 아기는 바닷소리를 들으며 자라왔다. 이제 그 아기는 노인이 되었고  굴 따러가던 엄마는 하늘 나라에 가시었다. 섬진강 하류 노량해협은 급속한 해류가 흐르는 곳이다. 가까운  태인도는 바다에 반쯤 잠겨있는 섬인데 춘분·청명 절기의 썰물이 빠지는 사리 때면 육지가 되는 섬이었다. 태인도가 모세의 기적처럼 육지로 떠오르는 이른 봄 무렵, 남해, 하동, 순천, 광양의 처녀 총각들이 백합, 우럭, 조개, 문어, 미역, 고동도 잡고 봄나들이 하던 낭만의 바다! 그 봄날 시린 해풍에 귀밑머리 날리며 굴바구니를 들고 나룻배를 오르던 순천 아가씨는 지금은 `8학년`도 넘었을 것이다. 허지만 이 바다는 깊은 수심이 협곡을 이루고 급속한 해류가 흐르는 무서운 바다였다.
이 물살 거센 노량해협에 다리를 놓는 일은 상상도 못하는 꿈이었다.

마침내 1973년 6월 22일 섬사람들의 천추의 숙원인 남해대교가 개통되었다. 1968년 5월 10일 현대건설에서 시작한 이 다리는 6년간의 난공사 끝에  역사적 준공을 이뤄냈다. 그러나 교각이 세워지던 60년중 무렵 공사가 한창 진행중인 데도 남해 노인 어느 분은 "이 다리가 되는가 봐라" "내 생전에 다리가 되겠느냐? 만약에 이 다리가 놓이면 내 눈을 빼라"며 우기던 분도 있었다.

남해는 왜 귀양 오는 유배의 섬이던가!
나룻배 타고 노량부두에 내리던 백이정, 김만중, 김 구, 유의양, 남구만, 이이명의 옷소매가 펄럭이는 듯하다. 어머니를 극진히 사모하던 김만중의 눈물이 이 부두에 스미고 귀양의 외로움을 달래려고 노래하던 김구의 룗화전별곡룘.
"천지애(天之涯) 지지두(地之頭) 일점선도(一点仙島) 좌망운(左望雲) 우금산(右錦山), 하늘의 가이오 땅의 머리인 아득히 먼 한 점 신선 섬에는 왼쪽은 망운산이요  오른쪽은 금산이라."
부르던 노래가 지금도 푸른 물결따라 들리는 듯하다.      
충무공 이순신의 우국 영혼은 대성운해(大星隕海)가 되어 노량바다 이락포 굽이에 고이 잠들고 있고.
할아버지 이예모 님은 설천 남양리 (떼더리 마을) 마을에서 태어나시고 가난한 유년을 보내시었다. 남해와 하동을 왕래하면서 소금이나 농산물을 교환하는 상업을 하시며 근동간 서당 학우들과 교류하기도 하였다고 한다. 1919년 늦봄 하동 진교에서 만난 서당 친구 한 분이 남해사람은 독립만세도 부르지 않는 `섬놈들`이라고 빈정대는 걸 보고 너무 속상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날 바로 독립선언서를 구해가지고 그날 밤 남양 서당에서 태극기를 만들고 뒷날 4월 3일 설천 문항동산에서 서당 학우들과 같이 대한독립만세를 외치니 이게 바로 남해 3.1독립만세운동이었다.
섬사람은 이렇게 무시당하는 일이 많았다.
1945년 8·15 해방이 되기 전 그 여름날의 노량부두!  빠알간 일장기를 가슴에 두르고  나룻배를 오르던 봉주 삼촌의 뒷모습이 사라지지 않는다. 살아 올지 죽어 돌아올지 기약없는 길, 일본군으로 징병되어 가던 날, 봉주 삼촌이 흔들던 하얀 손수건 깃발은 영문도 모르는 철없던 나에게 심어져 지금도  이 노량바다 푸른 물빛에  언뜻언뜻 어른거리고 있다.
1950년 6·25 전쟁 발발 후 전선은 너무 쉽게 무너져 남해도 인민군이 점령하게 되었는데 빨간 휘장에 초록 복장을 한 앳된 인민군이 노량바다를 건너 행군해 오던 발자국 소리도 잠겨 있구나.

1951년 남해중학교 2학년 때 난생 처음으로 부산 나들이를 한다. 부산상고 재학중이던 형님을 따라 부산을 간다. 도선을 내려 큰 여객선을 오르려는 순간 큰파도가 밀려와 큰배에 오르지 못하고 있을 때 힘센 선원의 도움으로 겨우 큰배에 오르던 그날이 생각난다. 노량해협의 물살은 이리 급류였다. 노량부두 도선을 내려 큰 여객선 금양호를 오를 때 그 느낌은 황홀하고 너무 두근거렸다. 그후 남해농고를 마치고 부산사대로 진학을 하였는데 그 무렵은 남해와 부산을 내집처럼 내왕하는 시절이었다. 청운의 꿈을 안고.
해상교통이 활발하던 이 시절 부산과 여수를 오가는 여객선은 하루에 주야간 3번 정도로 교대해가며 손님을 실어 날랐다. 이 당시의 여객선 이름을 상기해 본다. 보통 여객선으로는 흥안호, 태안호, 태평호이고, 대형 여객선으로 갑성호, 한일호, 한양호, 경복호, 보성호, 금양호, 창경호, 남해호 등이었고 마산을 오가는 여객선은 천신호였다. 대교가 개통된 후 엔젤호 비너스호 등 쾌속선이 운항하였지만 육상교통이 편리해지면서 여객선은 거의 사라지고 만다.
부산을 가는 남해사람들은 바빴다. 꼭두새벽 미조, 은점, 평산, 지족, 서상에서 출발하는 신흥여객, 남해여객 버스를 타고 남해읍에 도착하면 노량가는 버스를 갈아타고 노량부두에 내려 여수에서 오는 부산행 여객선을 기다린다. 이른 새벽 여수에서 출발한 여객선은 하동 노량, 남해 노량, 삼천포, 통영, 거제 성포, 낙동강 하류를 거쳐 영도다리가 들면 오후 4시경 부산,대교동 여객선 터미널에 도착한다.  쌀, 김치, 생선등 남해에서 실었던 짐을 부산부두에서 푼다.   
늦은 점심때 통영부두에서 먹던 오징어 깍두기김치의 충무김밥 맛은 지금도 군침이 감돈다. 피로해 잠이 들던 3등 선실이 생각난다. 갑자기 쇠손가락 의수를 내밀며 연필이나 공책을 사라고 내밀던 그 상이군 아재는 지금은 보훈의 연금을 받고 잘 살아가고 있겠지? 낙동강 하류 거센 파도에는 이 큰 여객선도 한바다에서는 맥없이 뒹굴며 흔들렸다. 3등실 후줄건한 뱃냄새 사람냄새로 역겨웠던 뱃멀미도 이제 회억으로 남아 있다. 그 무렵 그 해 한파의 동짓달 음력 설맞이를 앞둔 날, 많은 승객들을 실은 밤배 창경호가 출항 후 낙동강 하류에서 큰 파도에 부딪쳐 침몰한 대형 사고가 있었다. 아까운 남해사람들을 수장으로 삼킨 겨울 바다는 지금도 말없이 흐르고 있다.

이제 남해대교가 개통된 지 48년!
샌프란씨스코의 골든 게이트 같은 금문교가 우리나라 최초로 건설되었다. 기적을 가져온 환희의 그날 1973년 6월 22일! 개통 테이프를 끊은 그날은 노량 바다는 거센 바람이 불었지만 축제의 날이었다. 전국에서 모여든 사람들은 개통의 광경을 보기 위하여 전날 밤부터 인근에서 투숙하였고  그날은 하동 노량과 남해 노량은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이 거룩한 최초의 대교를 세운 주역은 누구일까? 금암 최치환 님과 청람 신동관 님이시다.
남해대교와 관련된 금암의 의지와 집념의 편지 글을 떠올려 본다.

저 숙원의 대교가 완공되어 섬나라 내산 산골에서 태어난 어린가슴에 못처럼 상처를 주었던 `섬놈` 소리, 조상으로부터 물려받은 이 소리가 우리 고향에서 사라질 때 이 최치환이 조그만 사은의 표적을 하고 나도 떠날 것입니다.
개인의 영욕을 떠나 오로지 고향을 위한 뜨거운 사랑으로 금암이 열정을 바친 선물이 남해대교다.
청람 신동관 의원은 금암 선생 뒤를 이어 필사의 각오와 애향심으로 남해대교 준공을 확실하게 이끈 분이시다. 차질 없는 공사 진행과 예산확보 등 박정희 대통령의 경호처장 인연이 이 대교를 완공시킨 것이다.
노량항 숲길 아래 금암 최치환 공적비가 섰고 노량 공원엔 신동관 공적비가 서 있다. 빨간 교각은 하늘 아래 휘영청 서서 남해사람들을 우러러 보고 있다.
대교 모서리 `남해대교`란 박정희 대통령의 글씨 현판은 더 힘차다. 그 힘이 우리 남해 사람들을 보호하고 있는 듯하다.

공항의 이별은 여운이 없다. 이륙하면 멍한 하늘만 보인다.
기차역의 이별 또한 기차 꽁무니만 보면 곧 사라진다.
그러나 항구 부두의 이별은 종합예술이다. 부우웅… 뱃고동이 울면 끼룩끼룩 갈매기가 난다. "쌍고동 울어 울어 연락선은 떠난다, 잘 가소 잘 있소 눈물젖은 손수건…" 장세정의 애절한 노래가 흐른다. "노을진 한산섬에 갈매기 날으니 삼백리 한려수도 그림 같구나…" 이미자의 구성진 노래도 울려 퍼지면 배는 서서히 뱃머리를 돌린다. 드디어 부두에서 배가 멀어지면 그이가 흔드는 하얀 손수건은 마침내 하나의 점이 되어 먼 하늘로 사라진다.

노량부두
한 많은 남해이야기를 품고 푸른 물은 흐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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