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량바래길에 아로새겨진 선열들의 살신보국 함성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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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량바래길에 아로새겨진 선열들의 살신보국 함성소리
  • 남해타임즈
  • 승인 2022.04.11 16:08
  • 호수 78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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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부경의 남해바래길 이야기 36 │ 지선2번 노량바래길2

충렬사로 올라가는 입구 오른쪽 광장 언덕에 척화비가 서 있다. 양이침범 비전즉화 주화매국(洋夷侵犯非戰則和主和賣國), 계아만년자손(戒我萬年子孫) 병인작 신미립(丙寅作 辛未立)  "서양오랑캐가 침범했는데 싸우지 않겠다는 것은 화친하자는 것이요, 화친을 주장하는 것은 나라를 파는 것이다. 이를 만년으로 이어질 우리 자손들에게 경계하노라. 병인년에 만들어 신미년에 세웠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병인년은 1866년 천주교를 탄압했다는 명분을 내세워 보복으로 강화도를 침범한 프랑스군대와 일전을 벌인 해다.

병인양요의 전말은 이렇다. 1866년 (고종3년) 9월 3일(양10.11) 프랑스 극동함대 사령관 로즈 제독은 프랑스 선교사를 박해했다는 이유로 군함 7척에 육전대 600여명을 싣고 강화도에 상륙시켜 강화부(江華府) 성(城)을 공격하여 많은 인명을 살상하고 성내 외규장각(정조대왕이 왕실의 어람의궤와 주요문서 즉 역대 왕들의 친필, 서화, 고명(顧命)등을 강화부 성내에 보관해온 왕실 제2도서관)에 보관돼 있던 어람의궤(御覽懿軌) 297권을 포함하여 340여권과 은괴 19상자(19만9천7백 프랑)를 탈취한 후 외규장각을 불살랐다. 이때 소실된 문서는 800여종, 4700권이 넘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기억하고 있다. 2014년 4월 정부의 노력으로 프랑스 국립도서관에서 보관해오던 조선왕실 의궤 297책은 4월 14일 1차분을 시작으로 5월 27일 오전까지 4차례로 나눠서 귀환하여 국립중앙박물관 수장고에 보관 중이다. 고종시대 대원군은 양이보국책(攘夷保國策-오랑캐를 물리치고 나라를 보호하자)으로 항전의지를 분명히 하고자 했던 역사의 현장이었다.
신미양요는 신미년 1871년 6월 2일부터 6월 10일까지 미국의 아시아 함대 제너럴셔먼호 사건을 핑계로 강화도를 침범하자 전국에 척화비를 세우고 항전의 결의를 다졌다. 그래서 병인년에 짓고 신미년에 세웠다고 기록하였다는 것이다. 현재 척화비는 종로, 강화, 경주, 부산진, 동래, 함양군에 남아있고 대부분 통비인데, 대좌에 가첨석으로 건립된 경우는 남해가 유일하다고 볼 수 있다. 

충렬사 사당은 이순신 사액 사당 제1호가 1601년에 세워진 여수 충민사이고, 제2호 사당은 1606년에 세워진 통영 충렬사이며, 제3호는 1628년 초사(草舍)가 세워지고 1658년 건립된 남해 충렬사다. 아산 현충사는 1706년에 세워졌다. 사당 왼쪽에는 `충민공비`가, 오른쪽에는 `충무공비`가 있다. 왼쪽에 있는 `충민공비`는 1633년(인조11년) 남해현령 이정건이 세웠다. 이를 볼 때 이 장군이 1643년에 충무공 시호를 받았으므로 그 전에는 백성들이 장군을 충민공으로 불렀던 것 같다. 충무공 시호를 받은 이는 이순신 외에도 김시민, 남이, 정충신 등 조선시대 11명, 고려시대 개국공신 최필달 외 4명 등 16명이나 된다. 여수에 창건한 충민사는 1601년에 왕명으로 세워진다. 1660년에는 충렬묘비가 세워지고 1663년에 현종의 충렬사 어필이 사액되었으며, 한참 후인 1793년(정조17년) 5세손 이명상이 충무공비를 건립했다. 1866년 병인양요와 1871년 신미양요 때 장군의 사당은 서원 철폐령으로 통영 충렬사 등 전국 47곳만 남기고 모두 훼철됐다. 위패는 본당 뒤에 묻고 제기(祭器)는 향교로 이관했으며 이 충무공 묘비와 비각만 남아 있었다. 서원이 당쟁의 소굴이고 지방민을 침탈하고, 토지와 노비를 보유하여 왕권을 약화시키는 등 폐단이 속출된다는 이유로 1인 1사만 남기고 신미존치 47개소 외에는 모두 철폐하게 한 것이 바로 서원 철폐령이다.

충렬묘비 보천욕일
충렬묘비 보천욕일

그 뒤에 1922년 윤기섭과 고준홍에 의해 사우 세 칸이 신축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으며 가운데 영정과 노량해전도와 이순신의 결전도가 걸려 있다. 또 명나라 신종황제가 이순신 장군의 전공을 높이 평가하여 통영 충렬사에 도독인, 호두령패, 귀도, 참도, 독전기, 홍소령기, 남소령기, 곡나팔 등 명조 팔사품 진품을 하사했는데, 남해 충렬사에는 그림으로 보관(1954년)돼 있다.
충렬사에서 여운을 남기고 노량공원으로 리본을 따라 노량마을 동제를 지내는 밥무덤이 있는 당산나무를 지나 올라가자. 윤병호 독립지사 기념탑과 청남 신동관 기념비, 벚꽃나무 망향의 비, 보물섬마크 화단 등이 있는 노량공원이다. 19번 국도를 건너 산성산 탐방안내도가 서 있는 언덕으로 들어가면 데크 길이 잘 조성되어 있다. 자연환경적인 맛은 미흡하나 접근하기 쉬운 경로임에는 틀림이 없다.
아름드리 편백나무들이 서로서로 손잡고 야외소풍을 나왔다. 피톤치드가 만발하여 기분이 상쾌해진다. 피톤치드란 나무에서 분비하는 살균성 분비물질로 스트레스 해소, 심폐기능 강화에 좋고 살균작용과 공기정화 작용으로 상쾌한 기분을 느끼게 한다. 참나무, 소나무, 편백나무가 이 성분을 많이 분비한다고 한다. 그래서 송림과 편백림에 피톤치드가 많이 생성되어 건강에 좋다 할 수 있다. 노량대교 전망대 쉼터에서 잠시 노량대교 위용을 감상하며 휴식을 하고 다시 남해대교 쉼터이자 대교 전망루에서 임진왜란 당시 격전장이었던 그곳에서 선열들의 살신보국의 함성을 들으며 그날을 상기하면 노량바래길 3.2㎞가 종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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