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어장 열리는 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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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어장 열리는 날
  • 남해타임즈
  • 승인 2022.04.11 16:10
  • 호수 78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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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경의 남해일기

4월의 봄은 거짓말 같았다. 부지런하게 피어나던 2월의 매화와 3월의 목련은 어느새 꽃잎을 떨구고, 연한 잎을 새빛처럼 달았다. 작년보다 늦장을 부린 벚꽃이 4월을 열고 있다. 꽃잎 보고 돌아서면, 또 꽃잎, 돌아서면 또 꽃잎이다. 화전(花田). 꽃밭이라 불려오는 남해는 역세권보다 좋다는 요즘 꽃섬을 이루고 있다. 눈도 호강하고, 마음까지도 고운빛으로 물들이는 치유의 계절이다.
4월 1일은 남해초등학교 개교기념일이다. 내 생일이라고 쉬는 법은 없었지만, 학교 생일엔 학생들의 봄날이었다. 4월 1일에 공휴일이 걸리면 괜히 받은 돈 도로 뺏어가는 세뱃돈 같았다.
"엄마, 개교기념일에 학교 안 가요?"
"하모. 학교생일이라고 할머니 때부터 쉬었고, 엄마도 학교 다닐 때 4월 1일에는 꼭 쉬었다."
"코로나 때문에 쉬는 날이 많아서 안 쉬는 거 같아요. 쉬는 거면 선생님이 미리 알려주실 건데요."
"그렇네. 학사일정을 이수해야 너희들 졸업도 할 수 있으니깐. 선생님이 쉰다는 거 공지를 안 했으면 학교 가면 돼."

4월 1일은 공식적으로 거짓말을 할 수 있는 만우절이기도 해서 학창시절에 친구들이나 선생님에게 눈속임이나 거짓정보로 교실은 도때기시장 같다가도 웃음이 교실창을 타고 옆반으로 흘러들기도 했다. 그때 그 시절, `여행을 떠난 설악산에서 등산객들이 함께 울산바위를 밀어 수백년동안 자리를 지킨 울산바위가 굴러떨어졌다`는 이야기는 설악산이 어디 붙은지도 몰랐던 때 몇해를 우라 먹고 유행이 지났다. 여고시절, 만우절 아침에는 바빴다. 칠판에 분필로 실컷 낙서를 하고 지우개로 지워 교실 문틈 위에 칠판지우개를 공갔다. 교실 문을 여는 순간 분필이 가득 묻은 칠판지우개가 선생님 머리 위로 떨어지면서 선생님의 머리카락은 은발로 변했다. 선생님이 머리카락에 분필을 털어내는 동안 학생들은 책상을 두드리며, 짝꿍과 하이파이브를 하며 작전성공의 세레모니를 했다. 알면서도 속아주는 선생님 덕에 수업시작도 즐거웠다. 선생님 중에는 이미 이런 이벤트에 이골이 나서 옆구리에 낀 출석부로 교실문을 연 다음 칠판지우개가 바닥으로 곤두박질치고 나서야 개선장군처럼 교실로 발걸음을 떼신 분도 계셨다. "우~~~ 우~~~" 우리가 엄지손가락을 바닥으로 향하고 야유를 날려도 너희들의 장난에 놀아나지 않겠다는 듯, "오늘 몇 페이지 할 차례고?"하면 우리는 자동으로 책을 펴고, 허리를 세워 앉았다. 짝사랑하던 이성에게 만우절을 핑계로 고백을 하고, 썸을 타기도 했다는….

벚꽃잎이 흩날리는 시즌이 되면 어촌마을에서는 갱번을 열었다. 어촌계에서 종패를 뿌리고 남해갯벌이 키운 남해산 조개. 소정의 이용료를 내면 바닷물이 들 때까지 조개를 양껏 캘 수 있다. 자그락 자그락 호미 끝에 부딪치는 조개껍데기는 손 끝에 황금을 캐내는 쾌감을 주었다. 한쪽 손으로 호미질을 하고, 다른 손으로는 조개를 주워 소쿠리에 담는다. 갯벌이 가득 묻은 조개는 망사에 담아 움푹 패인 웅덩이에 고인 갱물에 짤짤 흔들어 씻으면 인물이 훤한 조개들만 남는다. 조개껍데기에 있는 무늬는 산수화 같기도 하고, 기하학적 무늬가 있는 그림처럼 보이기도 했다. 이용료를 낸 만큼 갯벌체험을 할 수 있는 어촌체험마을들이 많이 생겨나고, 정해진 날에 실컷 실력대로 조개를 채취했지만, 내가 어릴 때는 조개를 캔 만큼 무게를 재서 돈으로 바꿔주는 패류양식업을 하는 분이 있었다. 동산마을에 조개를 캔다고 하면 가까운 마을 사람들 중 호미질 좀 한다는 사람은 다 모였다.
"엄마, 조개캔다고 방송하는데 우리도 조개 캐서 돈 좀 벌까?"
"아서라, 그것도 취미가 있는 사람이 허는기제."
"은니야, 우리 조개캐러 가자."
"니 할 줄 아나?"
"조개를 까는 것도 아니고, 호미로 긁으면 조개가 나올끼다. 가보자."
"엄마, 조개캐서 버는 돈 전부 우리가 하는기네. 돈 주라고 하기 없기."
"너그가 조개를 캐여, 조개가 너그를 캐끼다."
"은니야, 우리 완전 많이 캐서 부자되어서 오자."
"있어봐라. 옷 갈아입고 오낀께, 그모 한번 가보자."
일찍 온 사람들이 자리를 잡고 조개를 그득그득 파내는 사이로 엄마와 언니, 나는 보무도 당당하게 갯벌로 진입했다. 옆사람들은 손바닥만한 백합도 잡는데, 나는 호미에 돌멩이만 걸려 올라온다.
"요게는 조개가 없는갑다. 저짝에 가보자."
"니는 눈을 깜고 파나, 조개가 천지삐까리다."
"내는 자꾸 와 돌멩이만 나오네. 은니야, 자리 한 번 바까보자."
"조용히 하고 조개를 파라. 주변에서 정신사납다고 머라쿤다."
우리동네 조개캐기 1인자 할머니가 혼자서 100킬로그램을 넘게 파는 동안, 우리 세 모녀는 20킬로그램도 채우지 못했다. 바래는 취미가 있어야 하는기라, 내 아무리 꼭디 신짝을 붙이고 따라 나서도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
어촌마을에 갱번이 열리는 날, 조개를 캐러 가야겠다고 말이라도 꺼내면 엄마가 늘상 하는 말은  "그게다가 돈을 내고 파느니 니 실력으로는 사 묵는기 싸게 친다."  `난 양보다 질이야. 엄마, 나는 추억을 먹고 살고 싶다고` 그 시절에 엄마의 삶이 팍팍했을까봐 나는 반박용으로 생각한 말을 내뱉지 못한다. 말은 억지로 속으로 욱여넣고, 봄이면 갯벌이 청정하게 보존된 어촌마을마다 남해의 황금어장이 열리길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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