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와 땀, 눈물로 지켜낸 대한민국…우리를 기억해 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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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피와 땀, 눈물로 지켜낸 대한민국…우리를 기억해 달라"
  • 전병권 기자
  • 승인 2022.04.22 09:41
  • 호수 79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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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남기기 1화 최준환 6·25 참전 유공자

지리산 공비 소탕작전 투입 소대 연락병 활약
90세 넘은 동지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해주길 소망해
최준환 6·25&월남전 참전유공자 흔적 남기기 추진위원장이 지리산 공비 소탕작전을 설명하고 있다. 관람객이 없을 때 기자의 요청으로 잠시 마스크를 벗은 모습이다.
최준환 6·25&월남전 참전유공자 흔적 남기기 추진위원장이 지리산 공비 소탕작전을 설명하고 있다. 관람객이 없을 때 기자의 요청으로 잠시 마스크를 벗은 모습이다.

"북한군은 남한 경찰들을 멸시했어…마을마다 경계를 섰는데 북한군이 경비원을 학살했지." 93세의 연세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또렷하게 상황을 설명한다. 군번 925-3344, 최상성 장개자·부부 사이에서 1930년 7월 12일 태어난 최준환(崔峻煥·93세) 6·25 참전 유공자의 회상이다.

그의 나이 15세 때 일제강점기가 끝났고 가난의 시작, 연속이었다. 최준환 유공자가 기억하는 주소는 삼동면 봉화리 1842번지, 이곳에서 나고 자랐다. 최 유공자의 기억을 거슬러 올라가면 6·25전쟁이 발발하고 입대하기 전, 지리산 공비 토벌작전에 전투경찰로 먼저 투입됐다. 그 이유는 당시 작전사령관으로 있던 최치환 선생의 영향이 컸다. 

최 유공자는 "1951년 여름, 7~8월쯤인 것 같은데 그때 남해도 점령당했어"라며 "전투경찰로 복무하고 있을 때 영장을 받아 남해로 왔고 나라를 지킬 수 있다면, 마음으로 자원입대를 결심했어"라고 입대과정을 설명했다.

때는 1952년 2~3월쯤이라고 한다. 인천상륙작전(1950년 9월 15일~1950년 9월 16)이 진행된 뒤 대한민국 국군이 영토를 회복을 했을 때다. 그래서 당시에는 남쪽에 남아 있는 북한군, 인민군들이 잔재해 있었다. 

제주도 2연대에서 93일 동안 훈련을 마친 최 유공자는 부산 제1보충대에 부대를 옮긴 후 872부대 즉 지리산 공비 소탕작전에 투입된다. 전투경찰로 활동하던 무대와 같은 장소다. 이 작전은 보통 전투와는 다르게 숨어 있는 북한군을 수색해야 하는 임무다. 그는 각 소대를 연결하는 무전기 연락병의 역할을 수행했다. 당시 소대는 4개로 기억하고 있다.

최 유공자는 당시 보편적인 장면을 이렇게 묘사한다. "우의를 착용하고 수색 하는데, 땀과 비가 섞여서 속옷까지도 금방 젖어. 배 고프지, 잠 못 잤지. 조금만 방심하면 언제 죽을지도 모르지. 잠깐 휴식할 때도 선 채로 자는 경우가 허다해. 조금만 시간 지나면 낙오돼서 언제 죽을지 몰라"라고 말이다.

최준환 위원장이 자신이 기증한 자료를 보고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최준환 위원장이 자신이 기증한 자료를 보고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민가 약탈, 북한군 기지 발견
여러 일화를 소개한 최 유공자의 기억은 생생하다. 그 중 하나를 소개하자면, "지리산 고지대에 주둔하고 있으면서 식수와 밥을 짓기 위한 물을 구하러 계곡으로 내려가야 되거든. 그러면 당시 당번병은 기습을 당하는 경우가 많았지"라며 "한 소대가 통째로 당하는 경우도 있었어"라고 밝혔다. 그래서 내린 특단의 조치는 새벽 사이 맺힌 나뭇잎의 이슬을 식수로 마시고, 반합 뚜껑에 모아 밥을 짓게 만드는 방법이다. 최 유공자는 "그 밥맛은 잊을 수가 없지. 누렇고, 써도 한참 써"라고 설명했다. 살기 위한 최선의 선택이다.

특히 "그놈들은 우리가 주둔해 있는 가장 근접한 마을을 제외하고 다른 마을들을 약탈했지. 마을에 있는 소, 돼지, 닭 할 것 없이 가축은 모두 탈취해서 자기들 기지로 가져가서 식량으로 썼지." 

이에 대한 설명의 근거가 곧바로 이어진다. 몇 개월이 지났을까?

최 유공자는 "비목나무들이 쌓여 있는 곳을 보니 작은 막사와 웬 대변들과 뼈들이 굉장히 많이 널브러져 있는게 펼쳐졌지. 자세히 보니 가축들 변이었고, 소뼈들이 많았어"라고 설명했다. 북한군의 기지를 발견한 것이다.

그렇게 1년 넘게 지리산에서 작전을 수행한 최 유공자는 작전이 완전히 끝나지는 않았지만, 그간 공을 인정받아 부산 동래구에 위치한 제2보충대로 편입돼 1년 넘게 복무한다. 그렇게 목숨이 오가는 현장에서 1년 넘게 버텨낸 것이다. 

본인도 생이별을 하고 입대했지만, 부산 제2보충대 생활에서는 "입대하는 아들이나 땅에 퍼지고 앉아서 손을 흔들면서 눈물을 흘리는 어머니나, 갓 결혼하고 생이별을 해야 하는 부부나, 한탄하는 모습이 너무도 흔한 장면이었지"라고 말하며 당시 장면에 잠기는 최 유공자. 

그런 군 생활 끝에 그는 휴전 전인지 이후인지는 모르겠지만, 제대 후 곧장 삼동면 봉화리로 돌아갔다고 한다.

오늘도 태극기를 향해 경례하는 최준환 위원장.
오늘도 태극기를 향해 경례하는 최준환 위원장.

"진작 흔적을 남겼어야…"
최 유공자는 "돌아가신 분이 수천 명이다. 진작 흔적을 남겼어야 하는데…", "남은 유공자들도 병원이나 요양원에 있거나, 지팡이가 없으면 이동이 어렵다"라며 "군민들이, 국민들이 우리 동지들에게 따뜻한 마음을 전해주면 좋겠네"라고 말했다. 아울러 "피와 땀, 눈물로 지켜낸 대한민국이다. 우리가 죽고 난 뒤에라도 후손들이 계속해서 기억해주길 바란다. 노병을 대표해서 말씀드린다"고 소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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