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들을 불러들이는 나무의 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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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람들을 불러들이는 나무의 힘
  • 남해타임즈
  • 승인 2022.04.22 09:59
  • 호수 79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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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연경의 남해일기

 봄꽃이 화려한 부활을 끝내며 꽃잎이 땅에서 다시 피어날 때, 출발눈치를 살피던 이파리들이 살곰살곰 기운을 차리기 시작했다. 나뭇잎 끝에 붙어있던 껍질들이 바람에 살랑살랑 씻겨지면 잎은 금세 무성해졌다. 나는 잎이 돋는 기미가 보이자 아침마다 지나다니며 나무를 관찰했다. 3일 동안은 스트레칭을 하고, 4일부터는 트레이닝을 마친 선수처럼 잎에 가속도가 붙었다. 일주일이 채 되지 않아 나무줄기의 잔가지까지 잎을 주렁주렁 달고 나무의 완전체를 이루었다. 일주일 중 엿새 정도를 보는 느티나무 이야기다. 느티나무에게서 받았던 위안이 크다. 직장생활이 3년이 채 되지 않았을 때, 마음속으로는 하루에도 몇 번씩 사표를 쓰고 있었다. 실행에 옮기기까지의 용기는 내지 못했는데, 엄마는 나지막한 소리는
 "직장생활이라 쿠는기 수븐거 하나 없다. 일도 다구지 해야 되제, 넘 눈치도 살피야 되제, 사람이라 쿠몬 심부를 해야 돼."
 "엄마, 그래서 내가 심부름 많이 하는 갑네."
 "심부름이 아니라, 심부. 심바람도 심빠람 나게 하몬 된다. 다 마음묵기 달렸제. 내는 너그들 키움시로 손톱이 아프도록 계단틈을 닦아도 이기 내 돈 나올 구멍이라고 생각하니 팔에 힘만 더 나더라."
 엄마는 늘 심부름을 심바람이라고 부르며 다독였다. 느티나무 같은 엄마였다. 그늘도 만들고, 나뭇잎 사이로 얼기설기 비치는 햇살처럼 우리들에겐 광명이었다.
 
 우리 부부는 쌍춘년에 결혼했다. 몇 년간 아이가 없었다. 혈연관계에 놓이지 않은 사람들이 밥값 못한다는 소리를 대수롭지 않게 했다. 엄마는 말없이 잉태에 도움이 되는 것들을 구해와 나에게 신경을 쓰기 시작했다. 그 관심이 높아질수록 내 속에는 하루에도 몇 번씩 뾰족한 송곳이 자라났다. 사무실에는 방문판매상들이 자주 드나들었다. 양말이나 스타킹, 칫솔과 치약을 판매하는 사람들이나 직접 만든 액세서리나 그림을 판매하러 오는 대학생들도 있었다. 나는 그 당시 나의 난임을 상쇄할 수 있는 것은 다른 사람들에게 베푸는 인정과 친절, 양보라고 생각해 남들보다 낮은 거, 남들보다 안 좋은 것을 차지하려고 노력했다. 그날도 잡상인이 내 책상 근처로 왔다.
 "안녕하세요. 칫솔 한묶음 만원이에요. 하나만 사 주세요."
 의자를 돌려 응대하려는 순간 다시 말을 꺼냈다.
 "선생님, 쌍둥이를 키우는 아빠예요. 애들 분유값 벌고 있는데, 칫솔하나 사주세요." 
 가까이 온 사람에게 응대도 하지 않고, 물건을 사주지도 않고 자리를 피해 버렸다. 잡상인은 불편한 몸으로 사무실마다 다니며 판매를 했고, 그 판매 노하우는 `쌍둥이`였을 것으로 짐작했다. 아이가 없는 설움에 더해진 내 속의 악마를 잠재우지 못했다.
 
 내가 갈망을 버리고, 집착을 내려놓게 되었을 때 아이는 자연스레 내 품으로 왔다. 벚꽃이 흩날리는 계절에 딸을 낳고, 나무가 단풍으로 물들 때 아들도 안았다. 잔잔한 수면 위로 윤슬이 반짝일 때 아이들을 데리고, 시어머님을 뵈러 가면, 마을입구에서부터 왁자지껄했다. 한여름날에는 집 안에서 에어컨 바람보다 통풍이 잘되는 나무 아래서 더위를 피하던 어르신들이었다. 어르신들은 굳이 아이의 이름을 묻지 않는다. 애들 아빠의 이름을 붙여
 "아이구, 작은00이 할매 보러 왔나. 아~가 참 순타. 똑 저가배 애릴 때 맨키로 참말로 순타."
 "쪼글쪼글 못난 할매들 보고 울도 안 허네. 이 동네가 지고향인 줄 아는갑다야."
 "저그 할매랏꼬 알아보고 웃어삿는 거 보게. 참말로 피는 물보다 찐헌갑네."
 "저보게, 쪼매난 기 부채질도 잘해여."
 "엄마 안 힘들고로 잘 자고 해야제. 사나이는 울어삿코 그러는 거 아이라."
 아이가 알아듣는 것도 아닐 것인데, 어르신들은 아이에 대한 인사와 훈육의 말들을 한보따리 풀어냈다. 한마을에 갑장이 서른 명은 족히 되는 큰동네인데, 아이의 울음소리가 끊어진 지 오래라 어르신들은 아이가 부채만 흔들어도 칭찬이 폭풍처럼 쏟아졌다. 신세대엄마가 사용하는 육아용품을 신기해하고, 참말로 편하고 좋은 시절이라고 부러워도 하셨다. 어르신들께서 아이와 눈맞춤 하는 동안, 우리 부부는 바다를 구경하고, 나무사이 자갈길을 걷고, 차도 마셨다. 마을사람들은 커다란 나무 아래로 모여들었다. 이우지 사람 소식도 듣고, 누구네 송아지 출산이며, 누구네 손주 취직소식, 누구네 딸네 혼례소식을 나무와 같이 이야기 나누었다. 농번기엔 나무 아래서 새참을 먹고, 노곤한 몸을 누이며 오수의 즐거움도 갖게 하는, 세대와 세대를 잇는 시대의 공간이었다. 나무만큼 바쁜 식물이 또 있을까 싶다. 나무 아래서 사람들이 정답고, 나무를 끌어안고 함께 즐길 수 있는 공동체, 나무에게서 받는 위로가 선물 같은 시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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