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군은 백명의 베트콩을 놓쳐도 한명의 양민을 보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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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군은 백명의 베트콩을 놓쳐도 한명의 양민을 보호한다"
  • 전병권 기자
  • 승인 2022.04.29 09:58
  • 호수 792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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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남기기 2화 김태석 월남전 참전 유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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행정병·위생병·소총수 다양한 보직 두루 경험…전공 표창장도 받아
김태석 월남전참전유공자 남해군지회장이 지난 21일 남해유배문학관에서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김태석 월남전참전유공자 남해군지회장이 지난 21일 남해유배문학관에서 인터뷰에 응하고 있다.

"우리 동네 앞 바다에서 문어 11마리를 잡는 꿈을 꿨지. 근데 그 순간 산이 무너지는 소리가 나는 거야…." 김태석(78) 월남전참전유공자 남해군지회장이 전공을 세운 결정적인 순간이다. 김태석 월남전 참전유공자는 남면 덕월마을 출신으로 주민등록상에는 1947년 2월 3일로 등록돼 있지만 실제로는 1945년 1월 26일생으로 일제로부터 한국이 주권을 되찾은 해에 태어난 `해방둥이`이다. 군번은 51064565이다. 
 
면사무소 공무원 제5육군병원 복무
김 유공자는 22세가 되던 1966년 10월 행정공무원으로서 창선면사무소, 남면사무소에서 근무했다. 3년이 지났을까? 입대를 명 받아 1969년 7월 15일 39사단 신병교육대로 입대하게 된다. 김 유공자가 자대배치 받은 곳은 부산 수영구에 위치한 제5육군병원. 이병 김태석이 받은 보직은 행정병인데, 몰려드는 환자들로 인해 간호업무는 물론 당시 월남전 파병 용사들의 신체검사 등 의료 업무를 일부 수행해야 해서 위생병 역할도 겸할 수밖에 없었다.

김태석 지회장이 자신이 기증한 자료를 두고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김태석 지회장이 자신이 기증한 자료를 두고 당시 상황을 설명하고 있다.

월남전 자원, 가족 모르게 불효자 되다
그렇게 1년 가까이 흘러 1970년 그는 월남전 파병을 결심했고 결심은 현실이 된다.

김 유공자는 "군대에 갔으니 총도 쏘고 훈련도 받고 싶었거든. 또, 매일 큰 부상을 당한 환자들을 보는 것도 유쾌하지지 않았지"라며 "내가 또 문학을 좋아하다 보니 전쟁에 대한 글도 써보고 싶은 욕심도 있었어"라고 말했다. 이어 "그런데 사령부에서 우리 병원에 행정병 파병 차출 명령이 떨어진 거야"라며 "선임이 가야 되는데, 내가 자원해서 가겠다고 했지"라고 파병의 계기를 설명했다. 

집에는 "강원도로 장기간 유격훈련을 받으러 가니 연락이 안 될 수도 있다"라는 어쩌면 마지막이 될 수도 있는 말을 남긴 채.  강원도 화천 오음리 훈련소에서 4주 동안 파병을 위한 혹독한 훈련을 거친 후 맹호부대에 소속됐다. 

김 유공자는 "부산항 환송식에서 군악대랑 KBS합창대가 <잘 있거라 부산항>을 부르는데, 배에 탄 5천명 중 안 우는 놈을 찾기가 어려웠지. 사실상 죽으러 가는 거니까"라고 회상했다.

실제로 병사들은 전투는 물론 전갈이나  말라리아 등으로 사망한 경우가 많았다. 

1970년 9월 6일 건기에 맞춰 퀴논항에 도착한 일병 김태석. 땀이 절어서 소금이 절로 맺힌다. 그의 새 소속과 보직은 1연대 2대대 7중대 1소대 3번 소총수 겸 첨병. 첨병은 지뢰를 밟아 사망할 확률이 높다.

김태석 지회장이 기증한 자료들이다. 전공표창장과 맹호사단 마크, 월남전 참전기장, 군번인식표, 탄피들이다.
김태석 지회장이 기증한 자료들이다. 전공표창장과 맹호사단 마크, 월남전 참전기장, 군번인식표, 탄피들이다.

전공을 세우다
교전과 작전이 계속되던 가운데 한 달이 지났을 때, 야간 매복 작전에서 김 유공자는 찰나의 졸음 중 길몽(문어 잡이)을 꾼다. 베트콩(베트남 공산주의·군사조직)과 교전이 시작된 것. 근처에 있던 선임이 클레이모어를 4~5개 스위치를 누르자 우레와 같은 소리가 퍼졌다. 정신이 든 김 유공자도 자신의 앞에 베트콩들이 지나는 걸 발견하고 스위치들을 눌렀다. 곧바로 총알, 수류탄 할 것 없이 사격이 이어졌고 조명탄과 포탄지원을 받으며 새벽 1시부터 6시까지 버텼다. 작전지는 조용했다. 수색결과 12명의 베트콩 중 6명은 사망했고 6명은 도망간 것으로 조사됐다. 아군의 피해는 없었고, 상병 김태석은 연대장으로부터 전공표창장을 받게 된다.

김태석 지회장이 기증한 사진들이다.
김태석 지회장이 기증한 사진들이다.

김 유공자는 "우리 소대 다음 다른 중대가 매복 작전에 나갔는데, 경계가 한층 강화된 베트콩들에게 당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는 괜히 미안했지"라며 "늘 사상자를 접하는 전쟁통이지만 전우들이 당하는 소식에는 늘 마음이 아파"라고 회상했다.

6개월의 첨병 생활을 마친 김 유공자는 행정병의 임무를 하달받았으며, 마침내 집으로 편지 한 통을 보낸다. 집에서는 난리도 그런 난리가 없었다고 한다. 그렇게 지뢰와 총알 사이를 오가며 13개월을 근무하며 병장까지 진급했다. 전쟁 상황이지만 일기는 빼먹지 않았다.

김태석 지회장이 월남전 참전 중 쓴 일기 중 일부이다.
김태석 지회장이 월남전 참전 중 쓴 일기 중 일부이다.

1971년 10월 18일 월남에서 돌아온 김 병장은 남은 군 복무기간 6개월을 채우기 위해 경기도 포천에 소재한 5군단 관할 병참대대에서 근무했고 제대를 명받았다. 그렇게 35개월 3일의 군대 생활의 마침표를 찍은 것. 김 유공자는 "인생에서 가장 자랑스러운 일이 개구리복을 입고 제대한 일"이라며 "우리가 목숨을 걸고 다녀온 덕에 달러를 벌어 굶주린 국민이 줄었고, 대한민국 산업화에 이바지 했지. 그래서 나라가 선진국 반열에 올라설 수 있었어"라고 말했다. 

특히 김 유공자는 "한국군이 양민을 학살했다는 소문이 있는데, 이는 완전히 잘못된 이야기"라고 강조했다. 이어 "베트남 민병대원들과는 같이 작전을 했고 오락대회도 함께하며, 한국군이 대민지원도 나갔어"라며 "주민들에게 한국군이 엄청 많았지.  우리는 채명신 주월한국군사령관의 기본 방침인 `한국군은 백명의 베트콩을 놓쳐도 한명의 양민을 보호한다`는 원칙을 철저히 지켰어"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와 함께, 김 유공자는 "6·25&월남전 참전유공자 흔적 남기기 사업에 참여하는 1인으로서 전우들이 흔적을 기록할 수 있어 뿌듯해"라며 "그래서 이 사업이 유공자들의 처우개선과 권익 향상에 도움이 되도록 더 알려졌으면 좋겠어"라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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