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비 내리는 봄날
상태바
꽃비 내리는 봄날
  • 남해타임즈
  • 승인 2022.05.09 16:27
  • 호수 793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특별기고 │이현숙 칼럼니스트
이  현  숙칼럼니스트
이 현 숙
칼럼니스트

 개인적인 의견이지만 다른 계절에 비해 봄의 존재감이 미흡하다고 판단하는 데는 이유가 있다. 겨울과 여름 사이에 끼어, 언제 시작되고 언제 끝나는지 헷갈리기 때문이다. 일 년 열두 달 가운데 봄다운 봄은 사월 한 달과 오월의 절반을 합친 고작 달포 남짓이 아닐까 싶다. 그럼에도 봄의 이미지만은 사방 천지에 흐드러지게 피어나는 형형색색의 꽃만큼이나 강렬하다. 이와 관련해 뇌리에 저장 중인 추억의 한 장면을 긴급 소환하려 한다. 
 몇 해 전 봄비가 부슬부슬 내리던 날, 대형 할인점의 옥외 주차장으로 들어선 순간 나도 모르게 빵 터지고 말았다. 검정색 차량 한 대가 하얀 꽃잎을 함빡 뒤집어쓴 채 떡하니 주차되어 있었으니 그 희한한 광경에 뉘라서 웃음을 참을 수 있겠는가.
 호기심에 이끌려 바짝 다가가 살펴보는데 비에 젖은 여린 꽃잎들이 차체에 껌딱지처럼 찰싹 들러붙어 쉽게 떨어질 것 같지도 않았다. 이 같은 정황은 당일 차량의 움직임을 추정함에 있어 빼도 박도 못할 중요한 단서가 될 것이다. 하기는 `나, 이런 데 다녀왔소.` 아주 대놓고 광고를 하는 통에 행선 파악은 문제될 게 없다고 본다. 어디를 어떻게 다녔든 벚꽃나무 아래 머무른 사실은 분명하니까.

 봄꽃 하면 벚꽃을 가장 먼저 손꼽는 사람들은 모양과 색과 향기를 그 근거로 제시한다. 사실은 그보다 훨씬 더 뛰어난 특성이 있다. 다름 아닌 보들보들하고 야들야들한 꽃잎의 감촉이다. 한순간의 터치만으로도 상상 이상의 보드라움을 경험할 수 있다. 그런데 항간에는 벚꽃을 예찬하면 친일파 매국노 취급을 하는 극단주의자들이 없지 않다. 벚꽃이 일본의 나라꽃도 아니려니와 만개한 꽃무리는 그저 천진무구한 아기가 벙싯벙싯하는 형상을 하고 있을 터이다. 꽃은 그냥 꽃으로 봐 주면 안 될까. 모든 꽃은 아무 죄도 없다.
 그나저나 진짜 꽃으로 꽃단장한 차를 처음 봤을 때 차 주인이 어떤 반응을 보였을지 궁금하다. 누가 봐도 뜬금없는 상황이라 적잖이 당혹스러웠을 것이다. 그래도 운전은 해야겠으니 고양이세수 하듯이 운전석 앞유리에 붙은 꽃잎이나 대충 훑어낸 뒤 할인점을 향해 거리를 질주한 그 배짱 한번 두둑하다. 아무튼 생선 싼 종이에서 생선 냄새 나듯, 꽃비를 맞은 차에서는 꽃향기가 솔솔 풍겼다.
 언제나 그렇듯 올해도 짧은 봄날이 지나는 동안 무수한 꽃들이 무심히 피고 또 피었다. 그리고 무수한 꽃들이 온몸으로 `화무십일홍`을 입증하려는 듯 이내 지고 또 졌다. 말없이 피고 지는 꽃들은 이런 의문을 갖게 한다. 만약 꽃이 영원히 시들지 않는다 해도 우리가 꽃의 소중함을 알까. 이 땅 위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들의 유한성이야말로 어쩌면 삶의 목적과 방향을 일깨워주는 길라잡이가 아닐까. 인간이건 자연이건 그 존재의 의미나 가치는 죽음과 대비를 이룰 때보다 선명해지는 것이 아닐까. 
 봄비가 흩뿌리는 오늘따라 바람에 난분분하는 낙화가 몹시 쓸쓸한 감상을 불러일으킨다. 더구나 오늘은 마을회관 안내방송용 스피커에서 부음을 접했다. 한평생 흙과 더불어 살다가 이 짧은 봄마저 온전히 누리지 못하고 떠나는 이웃 마을 어느 노옹(老翁)의 삶과 죽음이 가슴을 할퀸다. 한번 피어난 꽃은 반드시 시들 게 마련이다. 사람도 세상에 태어난 이상 언젠가는 홀로 먼 길을 떠나야 한다. 그것은 불변의 법칙이다.
 봄비 말이 나온 김에 이야기 한 토막을 덧붙이고자 한다. 주지하다시피 올봄 초입인 3월 4일 오전 경북 울진의 한 야산에서 산불이 발생하여 급기야 강원 삼척으로까지 확산되었다. 최초의 작은 불씨가 기록적인 산불 화재의 원흉이 된 셈이다. 화마가 휩쓸고 지나간 213시간 동안 2만여 ha(서울면적 약 35%)의 산림 자원이 눈앞에서 소실되었다. 진화 작업을 위해 각종 소방 장비가 총출동했고 민관군 7만 명이 나섰다. 결정적으로 진화가 종료되기 전날 밤부터 당일에 걸쳐 봄비가 내렸고 곳곳에 남아 있던 불씨를 일거에 제거했다. 자연의 경이로움을 말로는 다 설명하기 어렵다.
 꽃비에 흔들리는 꽃잎을 보며 잠시 상념에 빠졌다가 깨어났다. 꽃의 허무(虛無)를 떠올리면 봄날이 더욱 애잔하게 느껴지지만 그렇다고 실망하기에는 이르다. 아직 봄은 끝나지 않았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주요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