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 하나는 잃었지만 목숨은 안 잃었다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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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 하나는 잃었지만 목숨은 안 잃었다이가"
  • 전병권 기자
  • 승인 2022.05.12 14:11
  • 호수 794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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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남기기 4화 김범수 6·25 참전 유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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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마고지에서 전투 중 포탄 파편 눈에 박혀

밤인데 방어하던 땐가? 능선에 보면 길게 연결된 호가 있어. 그 속에서 총을 견착하고 쐈지. 근데 갑자기 너무 아픈 기라. 이게 너무 아프다는 말로 표현이 안 돼. 포탄 파편이 오른쪽 눈에 박혔더라고

 

지난 6일 흔적 남기기 인터뷰를 위해 김범수(왼쪽) 6·25 참전 유공자의 집을 방문했다. 김범수 유공자와 그의 부인 조상엽(오른쪽) 씨가 환한 미소를 보이고 있다.
지난 6일 흔적 남기기 인터뷰를 위해 김범수(왼쪽) 6·25 참전 유공자의 집을 방문했다. 김범수 유공자와 그의 부인 조상엽(오른쪽) 씨가 환한 미소를 보이고 있다.

 "피가 철철 났제. 얼마나 아픈지 말로 표현 못할 정도다" 김범수(92·金凡秀) 6·25 참전 유공자의 인생에서 가장 강렬한 장면이다.

서면 동정마을 토박이
 서면 동정마을 토박이인 김 유공자는 김철한·박순지 부부 사이에서 태어났다. 주민등록상 1931년 3월 7일생으로 표기돼 있지만 실제로는 한 달 전인 2월에 태어났다고 한다. 5남 1녀 중 넷째로 당시 집안 형편이 어려워 초등학교도 가지 못했다. 김 유공자는 "행님 둘은 학교를 가고 누나는 못 갔지. 내 밑에 동생은 가고, 막내도 못 갔어"라며 "당연히 내도 학교 가고 싶었지. 근데 집이 가난해서 등록금이 없어서 못 갔제"라고 말했다. 이어 "우리 부모님이 니도 행님들처럼 학교 보내주고 싶었는데 참말로 미안타. 이리 말했던 기억이 나네"라고 설명했다.
 학교는 고사하고 먹을 것도 귀했던 시기라 김 유공자는 어릴 때부터 일찍이 부모님을 따라 벼농사와 함께 농업을 배우기 시작했다.

북한군의 첫 기억
 몇 살 때인지 기억이 안 난다. 10대인 걸로 추정되는 어느 날 새벽에 아버지가 김 유공자를 깨웠다. 김 유공자는 "저~쪽 남면 임진성을 지나서 북한군이 3열종대로 착착 발소리를 내면서 걸어가는 걸 봤제"라며 "그때가 밤이었는데 읍 방향으로 가는 걸 봤제"라고 회상했다. 그런데, 북한군 한 명이 김 유공자 집을 방문한 것. 당시 북한군은 김 유공자의 아버지에게 배가 고파 먹을 것을 달라고 요구했지만 먹을 게 없어서 주지 못했다고 한다. 
 
남해에서 제주도, 최전방 철원으로
 21세로 기억하는 1951년에 군대 입대 영장을 받은 김 유공자. 그는 "전시상황이니까 군대 가모 그냥 죽는다고 생각했제. 실제로 다 죽었으니까. 근데 별 수 있나? 고마 가야지"라며 당시 심정을 밝혔다.
 자포자기한 건지 덤덤한 건지 기억이 가물가물하지만 어쨌든 김 유공자는 서상항에서 배를 타고 삼천포, 통영 등을 거쳐서 제주도에 있는 훈련소로 갔다. 2연대로 기억한다. 9217960 그가 평생 기억하는 군번이다.
 이곳에서 강한 훈련강도와 배고픔보다 더 힘든 시련이 닥친다. 어머니가 유명을 달리하신 것. 
 김 유공자는 "편지가 왔다네? 중대장이 받아서 내한테 전달해줬어. 그러고는 내를 데리고 나가서 먹을 것을 좀 사줬어"라며 "밤에 울기도 많이 울었지. 임종도 못 지키고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상황이 원망스러웠제"라고 말했다. 
 4주간의 몸도 마음도 고된 훈련을 마치고, 훈련병들은 부산에 있는 유락초등학교(현 낙민초등학교) 운동장에서 몇 바퀴 돈다. 그러면 부모들이 아들을 찾아내서 만난다. 그러나 야속하게도 김 유공자를 향해 흔드는 손은 없었다. 어머니를 여의고 첫 면회 기회에 아무도 그를 찾아오지 않았다. "어린 나이에 참 감정적으로도 많이 힘들었제. 피눈물이 나더라"라며 "그래도 우짜겠네, 훈련 마쳤으니까 자대로 가야지"라며 세월에 무뎌진 당시 상황을 격하게 표현했다.
 
첫 임무는 시체 처리
 김 유공자는 강원도 철원군에 있는 15사단 38연대 직할 소속으로 자대배치를 받았다. 그는 "당시 전선 상황이 많이 어려웠긴 해도 남해에서 제주도 갔다가 최전방까지 내를 보내는 거면  참 멀다. 멀어. 그리 생각했제"라고 말했다. 
 자신의 보직을 보충병으로 기억하는 김 유공자. 그의 첫 임무는 전쟁터에서 사망한 전우들의 시체를 화장(火葬)하는 역할이었다. 참 특별한 임무다. 김 유공자는 "소총병으로 병과를 받은 것 같은데, 시체를 치우는 일을 하라대? 처음에는 시체를 봤을 때는 진짜 많이 놀랬지"라며 "근데 이 업무도 계속하니까 무덤덤해지대? 그렇지만, 트럭에 실려 오는 전우들의 시체를 내리고 불로 태우는 일은 다시는 못할 일이 아니겠는가"라고 되물었다.
 특히 그는 "시체는 움직임을 멈췄지만 그들의 손목에 채워진 시계바늘은 움직이고 있어"라고 의미심장한 말을 남겼다. 
 10~11개월이 지났을까? 김 유공자는 화장 일을 그만하고 전선으로 투입된다. 전적지는 그 이름도 유명한 백마고지(白馬高地). 그렇게 김 유공자는 북한군을 향해 총을 쏘고 대치하며 죽어가는 전우들을 보며 "나도 곧 진짜 죽을 수도 있겠네. 다치고 죽는 게 일상이었으니까"라며 상황을 설명했다.
 최전방에 투입된 지 1개월 정도 됐을 때 그 사건을 겪게 된다. 
 "밤인데 방어하던 땐가? 능선에 보면 길게 연결된 호가 있어. 그 속에서 총을 견착하고 쐈지. 근데 갑자기 너무 아픈 기라"라며 "이게 너무 아프다는 말로 표현이 안 돼. 포탄 파편이 오른쪽 눈에 박혔더라고"라고 묘사했다. 이와 함께 목에도 포탄 파편이 3~4개 박혀 큰 부상을 입게 된 김 유공자. 그렇게 국군병원으로 후송된다. 당시 강원도 제1야전병원(현 국군춘천병원)에서 수술(안구적출)한 것으로 추정된다. 그는 "진짜 아프고 힘들었제. 말도 못한다"고 회상했다.
 잠시 침묵이 흐른다. 그러고는 눈에 착용한 거즈를 걷어준다. 평생의 상처를 질문하는 기자로서 송구스러웠고 울컥했다. 
 김 유공자는 "눈이 빠져도 그만한 게 다행이다. 죽는 사람도 많은데 목숨을 부지한 게 어디고. 한쪽 눈이 없어도 일도 조금 할 수 있고…"라며 긍정적으로 생각을 했다고 한다.
 다행히 수술을 마치고 1년 6개월 정도의 군 생활을 마쳤다. 의병제대로 추측된다.
 이후 고향으로 돌아와 계속해서 농사를 지었고 부인 조상엽(88·섬호마을 출신) 씨를 만나 황혼기를 보내고 있다. 
 혹시 군 생활과 관련된 편지나 사진, 물건이 없느냐는 질문에 그는 "아이고~ 학교를 못 갔는데 글을 알겠나? 사진 찍을 시간이 어딨네? 너무 오래돼서 무슨 물건이 있었는지도 기억 안 난다"라고 답했다. 그렇다. 돌이켜보니 멍청한 질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6·25전쟁으로 인해 평생의 상처를 안고 살아가는 김 유공자. 그는 "내도 갈 날이 얼마 안 남았다. 이 나이에 이정도 기억하면 대단한 거 맞제? 사실 다 맞는가도 모르겠어"라고 말했다. 아울러 그는 "느그들은 전쟁을 안 겪어 봐서 얼마나 무서운지 모를 기다. 지금 평화가 공짜로 얻어진 게 아니다. 전쟁은 안 된다. 전쟁은 안 돼"라고 강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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