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신 잡는 해병대 유래" … 아군 피해 없이 북한군 전멸시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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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 잡는 해병대 유래" … 아군 피해 없이 북한군 전멸시키다
  • 전병권 기자
  • 승인 2022.05.19 12:00
  • 호수 79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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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남기기 5화 박주승 6·25 참전 유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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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 휴전 이후에도 군 생활 이어가
인천 강화도 양도 섬에서 북한군과 대치

북한군 전멸했제, 양도로 오던 배들도 피해 입고 못 왔제. 근데 우리 피해자는 한 명도 없었거든? 그러고 나니까 북한군에서 우리 보고 `귀신 잡는 해병대`라고들 말하더라고.

 

지난 11일 삼동면 전도마을에 위치한 박주승(오른쪽) 6·25 참전 유공자의 집을 방문해 인터뷰를 진행했다. 사진 왼쪽은 박 유공자의 둘째 아들인 박동주 씨의 아내 하향점(이동면 석평마을 출신) 씨다. 하향점 씨는 20년 넘게 시아버지의 군대 이야기를 들어 왔기 때문에 생생한 증언을 해주었다.
지난 11일 삼동면 전도마을에 위치한 박주승(오른쪽) 6·25 참전 유공자의 집을 방문해 인터뷰를 진행했다. 사진 왼쪽은 박 유공자의 둘째 아들인 박동주 씨의 아내 하향점(이동면 석평마을 출신) 씨다. 하향점 씨는 20년 넘게 시아버지의 군대 이야기를 들어 왔기 때문에 생생한 증언을 해주었다.

귀신 잡는 해병대 유래는?
 귀신 잡는 해병대. 이 말은 해병대를 뜻하는 상징과도 같다. 전 국민이 다 알 정도이니 말이다. 이 말의 출처나 유래에 대해서는 몇 가지 설이 존재하는데, 삼동면 전도마을에서 태어나고 살고 있는 박주승(92·朴周承) 6·25 참전 유공자는 자신이 경험한 전쟁터에서 북한군으로부터 이 말을 들었다고 한다.
 
물장구 치고 놀았던 유년시절 기억
 박 유공자는 1931년 10월 15일, 박득수·김말녀 부부의 7남매 중 둘째로 태어났다. 일제강점기였던 당시 대부분 가정이 그러했듯이, 박 유공자의 경제적 형편도 어려워 초등학교도 입학하지 못했다. 대신, 먹고 살기 위해 고모 집에서 농사일과 함께 허드렛일도 거들었다. 청소년기가 아닌 아이에게 얼마나 크고 어려운 일을 맡겼겠냐만, 농업과 어업을 하던 박 유공자의 친척들을 보면서 조금씩 일손을 거들며 일머리를 키워나갔다고 한다.
 그러다보니 한글을 배울 수 없었다. 이때는 알지 못했다. 배우지 못한 한글이 군대에서 서러움으로 마주하게 될 줄을.
 학교도 못가고 삭막했을 것 같은 그 시절에 대해 박 유공자는 "내 말고도 학교 못 가는 아이들이 수두룩했어. 그니까, 당연히 일을 해야 되는 걸로 알았던 기라"라며 "좋은 기억은 여름에 동네 친구, 형, 동생들이랑 물장구치면서 놀았던 거 말고는 기억이 안 난다야"라고 말했다.
 
전도마을 7명 중 2명만 곧장 입대
 6·25전쟁이 발발하고 1년이 채 되지 않은 상황에서 20세가 되던 1951년 겨울 입대 영장을 받게 된 박 유공자. 그는 "부산 용두산에 해병대가 주둔해 있었어. 우리 마을에서 7명이 신체검사를 받으러 갔제. 근데, 당시 병사계장이 우리 마을 출신인기라"라며 "거서 5명은 고마 집에 가삐대? 즈그 부모들이 똑똑하니까 편한 곳으로 보내고. 내 친구랑 내만 곧바로 군복을 주면서 입대하라는 거 있제? 그날 밤에 진해훈련소로 갔어"라고 회상했다.
 박 유공자의 말을 추리해보면, 당시 가정형편이 어려웠던 사람은 곧바로 입대하고 비교적 유복했던 가정은 편한 보직을 받거나 입대를 연기했을 것으로 보인다.
 지금은 해병대를 지원하고 합격해야 갈 수 있지만, 전시상황이던 이때는 일반 병사들이 해병대로 차출되는 경우가 많았다. 그렇게 해병대 11기 기수를 받고 구타, 가혹행위를 친구와 함께 견뎌가며 4주간 훈련을  마쳤다. 
 군번을 묻자, 기억이 나지 않다는 박 유공자. 한창 인터뷰 도중 `9214460` 두 차례 반복해서 얘기한다. 재차 군번을 묻자 기억이 나지 않는다는 그. 좀 더 일찍 찾아왔다면 명확히 기억했을 텐데, 당시 다른 해병대 군번을 보면 9로 시작해 7자리인 것을 보면 `9214460` 이 숫자가 군번인 것으로 확신한다.
 정확한 소속은 기억나지 않지만 박 유공자가 근무했던 곳이자 전투가 발생했던 장소는 바로 양도(인천 강화군 양도면). 이곳만은 또렷이 기억하며 반복해서 얘기했다. 또, 1958년 가을에 중사계급으로 전역했다는 이야기를 보면 부사관으로 입대를 했거나 병사에서 부사관으로 신청했을 가능성이 높다.
 이와 함께, 휴가 도중 아내 홍종순(이동면 무림리 혹은 정거리 출신) 씨를 만나 3남 3녀를 둔 단란한 가정을 꾸렸다.
 
한글을 익히게 된 사연
 그렇게 양도에 도착한 박 유공자. 북한군과 그리 멀지 않은 전방이다. 당시 첫인상은 집이 3채 있고 임시 막사가 차려져 있었다. 전시상황이었기 때문에 식량이 부족했고 배고픔과도 싸워야 했는데, 오히려 양도에서의 생활은 예상 밖이었다. 즉, 배고픔 만큼은 해소됐다는 것이다. 그 이유는 사람이 적은 섬이었기 때문인데 박 유공자는 "미역, 미역을 많이 따다 먹었어. 미역 갖고 국도 끼리고, 삶아 묵고, 별의 별 짓을 다 해서 묵었지"라고 웃으며 말했다. 아마, 깨끗한 바다에서 나는 해초나 물고기 등을 먹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런 가운데 유년시절 익히지 못했던 한글이 군대용어와 문서 등을 소화하기에는 큰 불편함으로 다가왔다. 배우지 못한 서러움은 그를 독학하게 만들었고, 정확한 표기법은 아니지만 당시 군 생활을 하는 데 표기하거나 의사소통에는 문제없이 글을 쓰고 익히게 됐다. 전시상황이었고 군대 안에서 공부할 생각을 했다는 걸 보면 서러움이 얼마나 컸고 대단한 집념이 있었는지 알 수 있다. 
 박 유공자는 "군대에 있을 때 글을 모르니까 환장하겠대? 바보 소리를 듣는 간부가 되겠구나 싶어서 익혔지"라며 "저녁 8시에 점호할 땐가? 뭘 보고할 때가 있었는데, 다른 부사관들은 글도 잘 못 읽고 더듬더듬하더라고. 내는 잘 읽고 보고도 잘해서 대학까지 나왔느냐는 얘기도 들었다"고 말하며 군 생활 중 즐거웠던 때를 떠올렸다.
 
양도에서 처음 들었던 귀신 잡는 해병대
 군인에게 가장 중요한 임무는 경계. 특히 전방에 있던 박 유공자는 바다 멀리 지나가는 북한군을 지켜보며 더 철저히 경계를 해야 했다. 
 그러나 예기치 않은 전투가 발생한다. 어느 날 밤, 북한군이 양도로 쳐들어와 박 유공자의 부대원을 살해한 일이 발생했다. 다른 부대원이 근무를 교대하기 위해 가다가 발견된 병사의 시체. 북한군은 곧바로 양도의 작은 산 고지에 올라 침투하라는 무전을 했다고 한다.
 그러자 북한군 배가 보이기 시작했고, 박 유공자는 곧바로 포 지원 요청을 했다. 후방에서 해군이 조명탄을 지원했고, 박격포가 양도 섬 고지와 침범하고 있는 북한군 배들을 향해 발사하기 시작했다. 우레와 같은 소리가 사방에서 터졌고 산 아래에서 박 유공자의 부대도 포위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퇴로를 차단하고 총격을 하면서 북한군 섬멸에 나선 것. 얼마나 흘렀을까? 동이 트면서 굉음은 잦아들었고, 경계를 늦추지 않고 고지를 향했다. 그러자 북한군인 20명의 시체를 발견할 수 있었다.
 박 유공자는 "북한군 전멸했제, 양도로 오던 배들도 피해 입고 못 왔제. 근데 우리 피해자는 한 명도 없었거든? 그러고 나니까 북한군에서 우리 보고 `귀신 잡는 해병대`라고들 말하더라고"라고 설명했다. 앞서 설명한 바와 같이 `귀신 잡는 해병대`라는 말의 유래는 여러 설이 있다. 박 유공자의 일화도 하나의 설이겠지만, 진실이 무엇이든 해병대의 용맹함과 전투력을 보여주는 대목이다. 
 박 유공자는 "내는 일반 육군으로 갔으모 전쟁에서 죽었을 기라. 오히려 해병대로 차출 되서 간 게 다행이고 또 자랑스러워"라며 "해병대, 육군 할 것 없이 6·25 전쟁에 참여했던 사람은 개고생한 기라. 죽은 사람이 얼마나 많았네? 이제는 기억이 희미해지고 있지만, 이렇게 내 얘기를 남겨줘서 고맙네"라고 말하며 여운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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