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넘게 머리에 박혀 있는 포탄 파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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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년 넘게 머리에 박혀 있는 포탄 파편
  • 전병권 기자
  • 승인 2022.06.16 10:57
  • 호수 799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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흔적 남기기 7화 이 간 6·25 참전 유공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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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경남도 북청군에서 남해군으로 오기까지
건강한 장수 비결 평생 `술·담배` 모르고 살아
마을에서는 영원한 중대장님으로 불려
지난달 27일 설천면 진목마을회관 앞 정자나무 밑에서 이 간 6·25 참전 유공자를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93세의 나이이지만,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인터뷰에 응해줬다.
지난달 27일 설천면 진목마을회관 앞 정자나무 밑에서 이 간 6·25 참전 유공자를 만나 인터뷰를 진행했다. 93세의 나이이지만, 환한 미소를 지으며 인터뷰에 응해줬다.

 6·25 참전 유공자를 상징하는 모자를 벗는다. 이마와 앞머리의 경계에는 검은 점 하나가 보인다. 두 손으로 가리키며 포탄 파편이 아직도 머리에 박혀 있음을 가리켰다….
 

이 간 유공자가 오른쪽 이마에 박혀 있는 점 같이 보이는 포탄 파편(빨간 동그라미 부분)을 보여줬다.
이 간 유공자가 오른쪽 이마에 박혀 있는 점 같이 보이는 포탄 파편(빨간 동그라미 부분)을 보여줬다.

어린 시절 북한에서의 기억
 이 간(李 墾·93) 6·25 참전 유공자는 1929년 11월 7일 함경남도 북청군에서 태어났다. 북청군은 남한의 강원도 동부지역과 인접해 있다. 이 간 유공자는 이현교·한솔섬 부부 슬하의 1남 5녀 중 넷째로서 집안의 유일한 사내이기도 했다.
 너무도 멀리 와버린 북한에서의 학창시절은 얼마나 기억할까? 
 이 유공자는 "우리 집이 과수원을 한 2천평 정도 했지. 논밭도 많았고, 집에 머슴도 2명 정도 있었으니까 꽤 잘 살았지. 아마, 단감이나 유자, 참다래 같은 작물을 길렀었어"라고 기억해냈다. 당시 이 유공자의 집안 형편은 마을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로 경제적으로는 준수한 편이었다. 
 그가 기억하는 집의 위치는 북청읍에서 20리 떨어졌고 덕성면사무소에서 600미터 떨어진 곳에 있었다. 강이 3개가 지나갔는데, 가까운 덕성초등학교를 강 때문에 다니지 못하고 10리나 더 떨어진 덕일초등학교를 다니고 졸업했다고 한다.
 그 과정에서 아버지가 유명을 달리하고, 가세가 기우는 가운데 어머니 혼자서 가정을 이끌어가야 했다. 
 그럼에도 학비는 충분히 감당할 수 있었기에 이후 북청읍 소재의 북청중학교와 북청고등학교(공업전문학교)를 연이어 졸업했다. 또 하나의 기억은 고등학교 3학년 시절 북한 최대의 종합비료생산공장인 흥남비료연합기업소(함경남도 함흥시 소재)에 실습을 나갔다는 것이다.
 
1·4후퇴, 가족과의 생이별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기억이 가물하지만, 이 유공자는 1·4후퇴(1951년 1월 4일, 중공군의 공세에 따라 정부가 수도 서울에서 부산으로 철수한 사건)를 기점으로 남한으로 오게 된 것으로 기억한다. 그때 나이 22세쯤이다.
 이 유공자는 "북한에 계속 있었으면 강제로 군대에 끌려가야 했다. 우리 마을에서도 남자들이 다 끌려갔고 생사를 확인할 길이 없었다"며 "우리 집은 지주였기 때문에 남들보다 더 주요 대상으로 손꼽혔다"고 말했다. 이어 "공산주의도 싫었고, 남한행을 결심하게 됐다"며 "흥남부두에서 고기잡이배 타고 주문진항(강원도 속초시 소재)에 도착했다"고 회상했다. 북한에서의 생활을 정리하고 남한에 첫 발을 딛게 됐다. 당시 마을에서도 남한으로 가는 남자들이 꽤 있었다고 한다.
 그렇게 끝나지 않을 것 같은 걷기가 시작됐다. 목적지는 피난민 연락소가 있는 곳인 대구였다. 현재 도로 기준 최적화 거리가 351km이니까, 당시 700km 이상 걸었을 것으로 추측된다.
 이 유공자는 "이북에서 온 사람인데, 오늘 하룻밤만 묵게 해 달라. 먹을 것을 달라고 부탁하면서 얼마나 걸렸는지 모르겠는데, 대구에 도착했어"라고 당시를 회상했다. 희미해진 기억이라 짧은 문장으로 설명하지만, 반복되는 말 속에서 얼마나 힘든 고행 길이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이 간 유공자는 국가유공자로서, 향토예비군 중대장으로서 각종 포장과 표창, 상을 받아 자신의 방 안에 전시해놓았다.
이 간 유공자는 국가유공자로서, 향토예비군 중대장으로서 각종 포장과 표창, 상을 받아 자신의 방 안에 전시해놓았다.

기왕이면 장교를 해야지
 대구에 무사히 도착한 뒤, 군대에 입대하게 된 이 유공자. "어차피 군대 생활을 할 거라면 기왕이면 멋지게 장교로 하는 게 낫겠다 싶었지"라고 말했다.
 이 유공자는 당시 고등교육까지 이수한 상태였기 때문에 방위사관학교에 입대한 뒤 1년 정도 훈련을 받고 육군보병학교(광주광역시 소재) 초등군사반까지 1년 정도 더 교육을 받았다. 당시 고등군사반은 영관급 교육반이었다. 
 이 유공자는 "아무리 먹어도 배가 고팠지. 월급은 턱없이 적었고. 배고픈 기억이 전부였어"고 당시 훈련생 생활을 기억했다. 이후 23세에 소위로 임관한 후에는 배고픔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고 한다.
 
지금도 남은 철모에 박힌 포탄 파편
 강원도 화천군을 주 지역으로 하는 7사단에 배속된 이 유공자. 전쟁이 한창인 중 그의 소대가 맡은 임무는 전기를 생산하는 화천발전소와 댐 방어였다. 주요 시설을 두고 대치하고 있었기 때문에 경계와 긴장은 24시간이 모자랄 정도였다.
 이 유공자는 "오늘 하루 지나면, 밤에 잘 때면 늘 언제 죽을지 모른다. 이런 생각으로 겨우 잠을 잤지"라고 말했다.
 복무한 지 얼마나 된지는 모르겠지만, 화천 작전지역에서 계속 있던 이 유공자는 포탄을 맞아 파편이 팔과 다리 그리고 철모를 관통해 이마에 박히게 된다. 
 이 유공자는 "처음엔 맞았는지 몰랐지. 나중에 좀 아프더라고. 이마에서 피가 흐르더니 짜릿짜릿하더라고"라며 "다행히 작은 파편들이고 깊이는 안 들어가서 다 뺄 수 있었는데, 이마에 박힌 거는 못 뺀다고 하더라고. 이거를 빼려면 머리를 크게 도려내야 한다고 해서 그냥 두라고 했지"라고 설명했다.
 시간이 많이 흐른 뒤에도 파편을 빼볼까 했지만 이마와 머리에 손상이 심할 수 있어서 훈장처럼 파편을 남긴 채 살아가고 있다.
 이 유공자는 병가 차원에서 여수 소재 15육군병원으로 추측되는 곳에서 얼굴도 예뻤던 김영의(1935년 12월 8일생) 씨를 만나 첫눈에 반하게 됐다. 당시 집안의 첫째 딸이었던 김 씨는 성숙미도 있어서 적극적으로 구애를 한 덕분에 두 사람은 휴가 중에 결혼을 하게 됐다. 그렇게 3명의 아들과 1명의 딸(셋째)을 낳고 단란한 가정을 꾸리며 살아갔다.
 1953년 7월 27일 밤 10시 정전 협정이 체결된 뒤, 이 유공자는 대위로 전역 후 여수를 중심으로 유선방송 설치 일로 생계를 이어갔고, 당시 방송기계를 설치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인력이 적어 남해까지도 출장을 종종 왔었다고 한다. 그렇게 남해에 첫 발을 들인 곳이 설천면이었고 현재는 진목마을에서 작은 소매점을 운영하고 있다.
 특히 이 유공자는 인터뷰 도중에 "갈수록 기억력이 떨어져. 그래도 이렇게 건강하게 있는 거 보면 술·담배를 안 배워서 그래. 자네도 술·담배를 하지 마"라고 수차례 강조했다. 
 설천면민으로서 이 유공자는 예비군중대장으로 오랫동안 활동하며 경남최우수중대로도 선발되기도 하며 마을에서는 아직까지도 중대장님으로 불리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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